사자가 자세를 바꾸면 밀림은 긴장한다
20년 전 카피라이터를 시작했을 즈음, 업계의 저명하신 분들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고 그 분들이 쓰신 책들을 읽으며 한창 롤 모델을 찾아다녔다. 이름 없는 광고기획사에서 이름 있는 광고대행사로의 꿈을 꾸며 참으로 열심히 헤맸던 것 같다. 그 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1세대 광고카피라이터이신 김태형 선생님의 <카피라이터 가라사대>였다. 60세에도 카피를 쓰시는 현업 카피라이터로도 잘 알려져 있었는데 좀 뒤늦게 알고 보니 광고회사라는 조직에서 실무로 60세까지 카피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즉, 한 번 카피라이터는 영원한 카피라이터가 아니었다.
광고회사에서 영원한 포지션은 없었다. 10년 차 이상 카피라이터가 되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줄여서 CD라는 타이틀을 달아야 생존할 수가 있다. CD는 광고회사 제작부의 광고 성과물을 책임지고 비주얼을 담당하는 아트디렉터와 광고문구를 담당하는 카피라이터와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광고주의 니즈를 반영하고 소비자 인사이트를 담아 소위 팔릴만한 광고 제작물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CD는 카피라이터 출신과 아트 디렉터 출신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광고 크리에이티브를 만드는 제작부 소속의 카피라이터와 아트디렉터는 일정 연차가 지나 경험이 쌓이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포지션으로 올라가는 게 수순이다. 영원히 카피만 쓰고 있을 수 없고 영원히 비주얼만 작업하고 있을 수 없다. 좀 더 높은 곳에서 광고 제작물의 전체를 관장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포지션으로 올라가지 못하면 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다른 업종의 회사도 마찬가지다. 한 번 사원은 영원한 사원으로 머물 수 없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상무, 전무 이사 등으로 올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만다. 회사는 연차가 쌓이면 개인에게 끝없는 포지션의 변화를 요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맡긴다. 조직생활은 그렇게 피라미드 구조로 들어갈 때는 넓었던 문은 살아남은 자들만을 위한 좁은 문으로 점점 직장인들의 책임과 포지션을 제압한다.
다시, 김태형 선생님의 <카피라이터 가라사대>로 돌아가면, 종종 외국에서는 머리가 희끗한 카피라이터가 현업에서 카피를 쓰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막연히 외국 회사를 동경했던 적도 있었다. 내 경우는 결론적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도 했고, 기획자 역할도 했고, 이래저래 다양하고 애매한 포지션으로 일을 해 왔던 것 같다. 일했던 회사마다 그 회사의 클라이언트마다 모든 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여서 그 때 그 때 나의 포지션도 필요에 맞게 변화하며 직장생활을 이어 나갔다.
직장생활이란 자신의 영역 확장을 끊임없이 요구받는 것이다. 한 번 외야수가 영원한 외야수가 될 수 없고, 한 번 투수가 영원히 투수만 할 수 없다. 밀림의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밀림의 날씨와 계절에 안테나를 세우고 자신의 자세를 바꿔가며 영역을 확장해가며 숲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