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까지 기회는 있다
너무 가고 싶었던 외국계 광고회사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닿은 그 회사 상무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카피라이터에서 플래너로 전향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무님께서 내 주신 과제는 국내 여성용품 브랜드의 인스토어 시장을 분석하고 그 중 N0.1 브랜드의 전략과 하위 브랜드가 1위 브랜드를 이기기 위한 전략 제시였다. 그때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는 주말마다 대형마트를 돌아다니며 여성용품 브랜드 구매 소비자를 관찰하고 인터뷰도 하고 자료사진도 찍으며 꽤 열심히 했다. 그 회사에 입사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열정적인 행동으로 수반되었다. 결과는 나쁘진 않았지만 유니크한 존재로 각인되진 못했던 것 같다. 바로 어떤 긍정적인 답이 오지 않았으므로.
몇 년이 지나고 상무님은 그 회사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을 다시 만났고,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다. 내가 들어갈 팀의 팀장과 미팅을 하게 되었고, 나는 플래너로써 그렇게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입사하고 보니, 내 강점이 가장 큰 약점임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 영어 실력이 그토록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는 지경인지 몰랐다. 여행지나 비행기 안에서 외국인과 복잡하지 않은 대화를 나눠 본 수준, 외국인 카피라이터를 팀원으로 둔 회사의 카피 팀장의 경력도 지니고 있던 터라 나는 사장님이 우려를 표명했던 매우 뛰어난 영어실력이라는 필요조건을 어찌어찌 맞출 수 있겠거니 오판했던 것 같다. 이것 역시 욕망이 부른 참사였다. 그리고 외국인 카피라이터와는 한국말로 주로 대화했던 것. 그가 한국어를 참 잘했기 때문에.
내가 들어간 팀은 정말 대단한 글로벌 스펙을 지닌 인재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때 마흔을 향해가고 있던 나보다 십 몇 년은 어린 20대 중반의 친구는 세계탑에 드는 학교를 나와 영어를 너무너무 잘했다. 외국인 같았다. 순발력도 재치도 너무 좋았다. 나는 점점 자괴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신감 넘치게 말하려다 보니 오버하는 것처럼 보인 걸까. 다른 팀과의 협업 때 나를 평가하는 얘기들이 오고 가고 우리 팀장 귀에도 들어갔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내 중심의 프로젝트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집에 일을 싸 들고 가서 새벽까지 기획서를 썼으나 겨우 나쁘지 않은 정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첫째도 둘째도 영어가 문제였다. 나는 그 회사의 업무를 쳐 낼 영어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폭망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영어 때문에 한없이 추락했다. 회사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20대 이후로 해마다 영어공부를 신년 계획으로만 세웠을 뿐, 제대로 실천한 적이 없었다는 걸. 나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언어에 그리 재능이 없는 게 아니었는데도 행동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 후로 9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다. 생각만 할 뿐이다. 내가 만약 폭망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그때부터라도 영어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 조금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를 잘하면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트라우마에 갇혀 있었다. 영어와 거리를 둔 채 잡사이트에서 영어실력을 원하는 구직자리를 볼 때마다 재빨리 화면을 닫아 버렸다. 난 이제 영어하는 회사엔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거야라고 자학하면서.
나는 폭망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했어야 했다. 자괴감은 시작만 늦출 뿐이고 기회만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걸 부디 여러분은 알아주기를. 죽기 전까지 늦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하리라 다짐해 본다. 넘어지면 일어나 도망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재빨리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 좋겠다. 나도 여러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