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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은 Oct 22. 2023

치킨과 김밥, 펜션과 커피

우리의 커리어는 죽지 않는다

한때 중년의 은퇴 시점을 지칭하는 사오정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어느 직장이나 피라미드 구조로 입사할 때 넓었던 문은 위로 연차가 쌓이고 올라갈수록 좁아져 중간관리자에서 반토막, 임원으로 올라가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직장을 본의로 타의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광고회사는 특히 직장 근속 년수가 높지 않다. 회사에서 나가는 사람들은 작은 회사를 차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대한민국에 가장 많다는 자영업의 세계에 진입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의 선배들의 경우, 당장 퇴사하지 않아도 돼 보이는데 치킨집 오픈을 목표로 주말마다 치킨을 튀기는 과정을 듣고 오기도 했고, 좋은 광고 많이 만들었던 카피라이터 선배는 마포에 김밥집을 차려 한 동안 운영을 했고, 강원도로 내려가 펜션을 오픈했으며, 동료도 바닷가 고향으로 내려가 항구 옆에 카페를 차리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그렇게 광고회사 직원에서 각자의 브랜드를 내건 치킨과 김밥과 펜션과 카페의 사장님들이 되어 제 2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나는 내 앞날을 보는 느낌에 사로잡혀 그들이 회사를 떠나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보며 우리네 커리어라는 게 단절이 아닌 이어짐으로 시너지를 낼 수는 없는지 한동안 고민했었다. 20여 년 동안 한 일을 버리고 전혀 다른 일에 가담해야 하는 현실밖에 없는 것인가라고. 그러고보면 나에 대한 오해 중의 한 가지가 나는 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변화를 추구하는 척만 했던 것 같다. 단절과 새로운 시작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왠지 그 동안 쌓아온 전문성이 이제 저 바다 깊숙이 유물처럼 묻혀 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사람이 커리어를 통해 얻는 지식이나 노하우는 어디선가 써 먹을 데가 있는 법이었다. 모두 각자의 업종에서 자신의 노하우를 발휘하여 상호부터 인테리어까지 브랜딩으로 빛내주고 있었다. 카피라이터 선배는 더할 수 없는 유니크한 김밥집 상호부터, 가게 앞에 붙은 매일 매일의 좋은 메시지까지 작은 가게에 작은 기획력을 덧붙여 참신하고 새로운 고객의 경험의 장으로 김밥집 이상의 문화 콘텐츠로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또 서울 모처에서 스터디 카페를 연 영상 감독님은 스터디 카페의 배너 광고조차 역량을 발휘해 오픈 5개월 만에 매출이 2배로 뛰며 매달 승승장구하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 커리어라는 게 인생이 지속되는 한 어떤 곳, 어떤 상황에서도 튀어나와 갈고 닦은 실력을 덧붙여 뭔가를 이루어내는 것인 것도 같아, 모든 경험은 언젠가 써 먹는다, 그리고 통한다는 진리를 깨닫게도 되었다.    

  

첫 번째 커리어를 그만두고 두 번째 커리어를 선택할 때조차 시류에 끌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의 선배들이 어떻게 치킨과 김밥, 펜션과 카페를 열게 되었는지 각자의 스토리가 있겠지만, 무엇이든 시도하고 이어나가는 그들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못하는 열의와 성실성, 도전과 모험 정신이 그들에게는 있다. 나도 지금 마지못해 무언가를 하고는 있지만, 이 일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도저도 아니라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회사를 떠나기 몇 발도 훨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준비 없는 마지막은 어쩔 수 없는 선택과 또 다른 방황의 연속성을 안겨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보면 커리어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몇 발 더 앞서 보고 몇 발 더 전에 준비하는 것 역시 중요한 것 같다. 내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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