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상고머리의 핵인싸 여고생(2)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7

by 메신저클레어
열 살부터 중풍 할머니를 간병하며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온 20여 년.
이유 없이 40대 중반에 뒤늦은 사춘기가 옵니다.
그래서 다시 열 살 꼬마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몇십 년이나 지났지만 어린 나를 만나, 그때 그 마음을 글로 어루만져줍니다.


https://brunch.co.kr/@m-claire/23

<짧은 상고머리의 핵인싸 여고생(1)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6>에 이어...


핵인싸라고 해서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상 억울할 일도 감수해야 했다.

고2 때 일이다.


반마다 5명씩 차출하여 아침마다 교정을 청소했다.

열심히 비질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 한문 선생님이 손짓을 하셨다.

쪼르르 달려가니 무서운 얼굴로 말씀하셨다.


"반장! 그 따위로 청소할 거야?!"

"... 네?"

"네가 반장이면 모범을 보여야지, 뭐하는 짓이야?"


열심히 하고 있었던 나는, 순간 너무 열심히 해서 혼나는 줄 알았다.

".... 무슨 말씀인지 제가 잘..."

"뭐라고?! 네가 왜 혼나는지 이해가 안 돼?!"


돌아오는 건 황당하게도 선생님의 설명이 아니라 매질이었다.

"선생님한테 지금 반항하는 거야?!

이거, 0반 반장 안 되겠네... 정신 못 차리고 있어."


손바닥도 아니었다.

엉덩이도 아니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굵은 회초리를 휘둘렀다.

전교생이 창문으로 다 쳐다보며 수군댔다.


"저기 운동장 한가운데서 맞고 있는 저 언니..?!"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렇게 맞는대?"


기가 막혔다.

그런데 그전에 어른이 이러는 걸 나 스스로 이해하려고 맞는 동안 머리를 빠르게 굴려봤다.

그러나 우리 담임선생님 옆자리에 앉는 교장선생님 딸랑이라는 것 말고는 파악되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국어를 맡으셨던 우리 담임 선생님은 학원 강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가르치셨다.

학생들에게도 나이스 하셨기에 실력과 유머와 인성을 모두 갖춰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단 하나, 전교조라는 태그를 달고 다른 선생님들의 미움을 사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데에 관심 없던 나는 그저 우리를 애정으로 잘 가르쳐주시는 멋진 선생님을 존경했다.


그날 퇴근 직전, 담임 선생님이 조용히 부르셨다.

"... 맞았다며...?"

"... 네에..."

불편한 정적이 이어졌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인 선생님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도 마음속으로 함께 울었다.


집에 오는 길에 가방 끈 닿는 곳이 이상하게 욱신거렸다.

엄마한테 어깨가 좀 불편하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맞아본 적이 없던 나에게 신기한 통증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 엄마가 갑자기 노발대발하셨다.

자초지종을 확인한 엄마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더니 급기야 교육청에 신고하시겠단다.


교사인 엄마가 이렇게까지 하실 줄 몰랐으나, 불현듯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이죽거리는 한문 선생님과 또 눈물을 보이시는 담임 선생님 모습이 함께 떠오른 것이다.

늘 외톨이처럼 지내는 우리 선생님에게 또 어떤 프레임으로 이 사건을 나쁘게 이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닿자 엄마를 한사코 말렸다.

나까지 부담드리기 싫었다.






그날부터인 것 같다.

나에게 숨은 반골기질을 발견했다.

담임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 교장 선생님 말씀에는 세상 좋은 사람처럼 허허 웃다가 우리 담임 선생님과 대화할 때는 비꼬고 견제하는 그 한문 선생님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사실 두 남자 선생님이 싸우던 말던 관심 없다.

그저 그 반 반장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사정없이 몽둥이질한 그 선생님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교문에 서 있는 선도부장인 그 한문 선생님께 깍듯이 인사했던 내가 달라졌다.

나를 때렸던 그 막대기는 애들 옷차림을 지적하는 데 쓰였고 그걸 볼 때마다 울분이 올라왔다.

마침 그 선생님도 마음 한켠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는지 내 눈을 피하더라.

그 모습이 더 싫었다.

교문 통과할 때마다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약국에서 과산화수소수를 구입했다.

앞머리에 묻혔다.

조금 지나니 약간 갈색빛이 났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 원래 엄청 모범생인데...


이래 맞으나 저래 맞으나 나쁜 짓이라도 해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짓도 아닌데 괜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좀 더 묻혀보았다.

앞머리가 환한 갈색빛이 되었다.

이 정도면 걸릴 만 한가?


아침마다 보란 듯이 교문을 통과하여 그 선생님 앞을 당당히 지나갔다.

처음엔 안 잡더라.

매일 조금씩 과산화수소수를 더해갔다.

어느 날 더 못 참으시겠던지 드디어 나를 불러 세웠다.


"야, 반장! 너 머리 색깔이 왜 그래?!"

이 날을 기다렸다.

최대한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난날의 억울함을 담아 나지막이 그러나 힘 있게 대답했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이 색깔인데요?"

이미 선생님의 이유 없는 매질에 대해 소문이 났던 터라 정당한 체벌도 부당하게 보일 시기였다.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냥 보내주셨다.

"이걸 그냥... 에이씨... 됐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직선제로 회장을 선출하자고 제안한 학생회장을 구둣발로 밟으며 체벌했다는 이 선생님.

사회 부조리도 아니고, 그저 교내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을 벌써 여고생 때부터 겪었던 우리 세대.

지금은 뉴스에 나올 일들이지만 그 당시 SNS는커녕 삐삐도 보급화되지 않은 그때에는 이런 소심한 저항이 전부였다.


그 가운데 학업 때문에 괜히 더 혼나지 않으려고 성적관리에도 힘썼다.

그러나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워 상위권은 혜택을 주고 중하위권은 불이익을 주는 한문 선생님의 편애에 지나치지 않았다.

그래서 상위권 친구보다는 중하위권 특히 꼴등을 도맡아 하는 친구들과 진심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을 뿐이지 정말 인성도 좋고 괜찮은 아이들이 많았다.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하다.


한문 선생님이 야간 자율 학습 담당일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튀.었.다.

어느 순간 눈치챈 선생님은 보다 못해 우리 반에서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아니.. 이 반은 왜 맨날 반장 부반장만 없어!"

내가 부반장도 꾀어서 함께 나왔더랬다.


Peggy_Marco@pixabay


고2 마칠 무렵 내 모습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학년 초 단정하게 머리를 짧게 깎고 바른 자세로 수업에 임하며 운동도 열심히 했던 나는 1년이 지나자 앞머리는 샛노래지고 수업시간마다 선생님 성향에 따라 수업 분위기를 좋게 혹은 나쁘게 조장하는 선동자?!


친구들은 더욱 많아졌으나 호불호도 갈렸다.

날티나는 반장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초고수 모범생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 친구들의 부당 대우와 아픔을 모르는 척 넘기는 이기적인 모범생도 그냥 꼴 보기 싫었다.

너무 일찍 부정적인 것을 맛본 탓일까?

글로 그림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도 없으면서 저항의 의지로 전투력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는 근육질의 만화 캐릭터를 그렸다.

반항하는 틴에이저 소설을 썼다.

음악은 당시 파괴적 그룹으로 유명했던 Nirvana(너바나) 혹은 X-Japan, 그리고 드렁큰 타이거의 랩만 들었다.


고맙게도 같은 방 룸메이트 할머니는 나의 이런 음악 취향을 다 받아주셨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할머니도 힙한 스타일?!

그리고 옆에서 머리 꼴이 그게 뭐냐, 글도 쓰지 마라, 그림도 그리지 마라, 음악도 그게 뭐냐, 공부만 하라고 잔소리를 하셨다면 그때 내 기질상 그 길로 공부를 접었을 것이다.

부처님처럼 할머니는 늘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봐주셨다.

깐부잖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재미있는 걸 좋아했던 영화같은 고2를 아슬아슬하게 마쳤다.

이유 있는 반항은 멋진 거라고 스스로 세뇌했던 것도 같다.

어쨌든 전두엽이 발달하는 질풍노도 시기에 거름망 없이 다양한 상황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어쩌면 할머니로 인해 누리지 못한 것들을 학교에서 얻으려고 일부러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냥 현실적인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었는지도...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8>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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