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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신저클레어 Sep 03. 2023

성장통

자퇴하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 딸에게

누가 권하지도 않았다.

작년 중3이던 딸아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전주에 있는 기숙 고등학교를 알고 난 후부터 그곳에 지원하겠다고 혼자 결정했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붙어도 고민 떨어져도 고민이었다.

붙으면 서울에서 전주까지 '내가' 어떻게 오갈 것이며, 떨어지면 혹시나 입시의 쓴맛과 좌절감에 상처받지 않을는지...


"너 왜 거기까지 가려고 해?"

"제가 갈 수 있는 제일 먼 곳 같아서요, 빨리 독립하고 싶고 기숙사 생활을 해보고 싶어요."


뭐야, 무슨 대학을 가고 싶어서 그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가 아니라 그저 집을 벗어나고 싶은 합법적 절차?

에라~ 마음대로 해라, 그럼!


딸은 마음대로 붙어버렸고, 지금 전주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중이다.

동시에 우려했던 고민은 현실화되었다.




1학기때 한 방 친구들은 하나같이 매우 활발했다.

말 한마디 없는 내성적인 우리 딸은 다행히 친구들의 이끌림에 여기저기 전주의 핫한 곳을 찾아다니며 청소년기를 즐기느라 전화 한 통 없었다.

약간 서운했지만 잘 적응했다 생각하고 웃어넘겼다.


'그렇게 집을 떠나고 싶었던가?

연락 한 번 없고... 그래, 좋겠다~'


잘 적응한 만큼 기가 막힌 내신 성적을 받고 1학기를 마쳤다.

뭐, 공부를 안 했으니 겸허히 받아들이거라~


문제는 2학기 때 시작되었다.

기숙사 방이 바뀌고 딸과 같은 내성적인 룸메들이 모여 묵언수행 절간과 흡사한 방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1학기 때 친했던 친구들도 모두 방이 바뀌면서 기존 친구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부 스트레스를 받는 어떤 친구에게 감정받이가 되고 있었다.

한참을 고통받던 어느 날, 펑펑 울면서 자퇴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엄마 떨어져 살고 싶다 해서 보내준 학교에서 졸업할 때까지 잘 지내야지, 갑자기 자퇴?!

한 번도 힘들다, 보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말한 적 없던 아이가 울며 엄마 오라고 하니 기분했다.

마침 교회 수련회에 가기로 하여 다음 주에 가겠다고 했더니 아이는 절박했다.


"교회 수련회... 꼭 가야 해요? 내일 와 주세요..."


나 역시 준비하는 공부가 있어 중간고사를 막 마친 상태라 컨디션이 바닥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심상치 않아 일단 가겠다고 하여 바로 다음 날 출발했다.

벌점 감수하고 임박한 외박 신청을 했다.

토요일이라 갑작스레 묵을 호텔이 없었고, 혹시 시험 보러 왔을 때 묵었던 모텔에 가도 되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흔쾌히 좋다고 한다.

정말 엄마만 온다면 어디건 상관없다는 아이의 태도에 자꾸 짠했다.


들깨삼계탕


입학 시험 당일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만 먹지 못했던 들깨삼계탕을 먹자고 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구나 하며 둘이 까르르 웃었다.

배 터지게 저녁을 먹고 스타벅스에 가서 티타임을 했다.

친구관계에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자기돌봄이 뭔지 설명해 줬다.


"미안한 게 없는데 상대가 화를 낸다고 해서 예의상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독이 돼."

"일방적으로 너에게 배려를 요구하는 친구에게는 친절할 필요 없어."


그러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친구와의 문자를 보여주는데 하.. 가관이었다.

착한 사람이 빌런의 타겟이 된다는 책의 문구가 생각났다.

아이는 말이 안 통할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야.

이런 감정 소모 말고, 서로 배려한다고 생각될 때 다시 얘기하자."

라고 대처하라고 했다.


열심히 공부해도 혼자 뒤처지는 느낌, 친했던 친구의 무례한 태도, 낯선 기숙사 분위기 등 아이에게는 총체적 난관이었고 이런 복합적인 어려움이 평소와 다르게 엄마를 그토록 애타게 찾게 했던 것이다.

아휴... 많이 힘들었구나, 우리 딸.


성장통은 말 그대로 성장할 때 느끼는 통증이다.

내가 이렇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것도 나 또한 성장통으로 고생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랑 하룻밤 보낸 딸은 한결 편해 보였다.

저녁까지 있다 가려했으나, 아이는 일요 낮잠을 자야겠다며 그냥 점심 먹고 헤어졌다.

이렇게 짧게 보려고 오라고 한 거냐! 엄마 얼굴 봤으니 이제 됐다는 뜻?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언제 또 부를지 모르지만 그 이유가 성장통이라는 걸 안 것만으로도 나 역시 안도했다.

다음에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연고처럼 들려주며 치료해 줄까...


m.Claire.


교내 비단잉어들, 너희는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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