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수레

일상 속의 소설

by hesed by


젊은 시절엔 인생의 수레에 온갖 잡다한 것을 다 넣고 다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온갖 잡(雜) 생각을 넣고 다녔고, 대학시절에는 알 수 없는 오기(傲氣)와 지금 생각하면 남부끄러운 낭만을 넣고 다녔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과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나의 수레를 항상 무겁거나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치기 어린 낭만을 채워주었던 사랑과 우정의 감정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에는 거의 사랑과 우정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애정에 목이 말라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내 공허한 수레를 채우려는 이기적인 노력이었을 것이다. 친구로부터, 때론 연인으로부터 우정과 사랑을 선사받고 내 안의 공허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난 이내 수레에 태워진 그들을 잘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너무나도 사죄하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그때는 마치 내 소유물인 양 소중한 이들을 내 수레에 거의 욱여넣고 다녔다.

그리고 난 수레를 끄는 방법도 잘 몰랐던 거 같다. 차라리 그냥 수레의 끈을 허리춤 어디엔가 매고 이리저리 마구 달렸던 거 같다. 내 수레에 탄 것들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계속 짊어져야 하는 것인지 버려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냥 수레를 매고 달리다 무언가 내 공허를 채울만한 것이 발견되면 주워 담기 바빴다. 난 내 수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랐다.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혹은 바퀴는 제대로 달려있는지조차도 잘 모른 채 그냥 무조건 달리고 주워 담았다. 내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젊은 날을 소비해 나갔다.

대학을 졸업하자 난 취업과 직장이라는 짐을 수레에 실은 채 또 한 번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했고,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혹은 내 수레에 이제 무엇이 남아 있는지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무조건 짐을 주워 담으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다 세월이 얼마간 지난 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 수레에는 아내와 자녀들이 타올라 있었다. 내가 가족을 이룬 것이다!

'가족'이라는 의미는 이전에 내 수레에 담긴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내가 원한다고 내 수레에 쉽게 태울 수 있는 존재도 아닐뿐더러, 내가 버리고 싶다고 버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난 가족에 대한 무게보다는 사랑이 훨씬 컸기에, 가족이라는 수레의 무게를 기꺼이 지고 나가겠다고 그리고 그 무게를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나의 섣부른 자신감은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나의 각오와 내게 닥친 현실은 매우 다른 문제였다. 때론 가족이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 잠시 쉬고 싶기도 했고 내가 이 수레를 잘 끌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이 나를 뒤덮어 불안에 헤매는 순간도 많았다. 세상이라는 위험하고 험난한 길은 수레를 한 발짝도 전진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마디에 다시 한번 힘을 주어 수레의 끈을 움켜쥐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나는 수레를 어찌어찌 끌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정신을 번뜩이게 만들고 가슴을 매이게 만드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수레는 나 홀로 끌고 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수고하며 가족이라는 삶의 수레를 열심히 밀어대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고마웠지만 잘 표현하지 못했다. 가족에게조차 짐을 같이 지자고 말하기에는 아직 내 마음은 너무나 닫혀 있었고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좀 더 세월이 흘러가 중년이 훌쩍 지나가고 삶의 전반기를 마칠 때 즈음이 되자, 내 수레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쓸데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의 오기, 자존심, 이기심, 욕망... 예전엔 그렇게 내려놓지 못했던 것들이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연스레 수레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레의 짐을 하나하나 내려놓을 무렵, 또 다른 문제가 한 가지 생겨났다. 쓸데없는 짐뿐 만 아니라 평생 같이 갈 줄 알았던 자녀들도 이내 어른이 되어 각자의 수레를 가지고 떠나야 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빈 수레가 눈에 들어왔고 거기에는 일순간 공허함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 공허함의 무게는 젊은 날의 공허함과는 결이 달랐지만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공허함에 당황스러웠다. 이제는 내 수레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가? 젊은 시절의 군더더기들은 떨어져 나가고 있었지만, 인생의 후반기를 빈 수레만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생을 추구하던 안정, 행복, 즐거움 등과는 다른 무언가, 내가 반드시 짊어져야 할 짐이 있을 듯했다.

사실 나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세상이 채워주는 것들의 한계를 수없이 경험했기에, 나의 공허함을 채워줄 진정한 해답은 세상에 있지 않음을 온몸으로 느꼈고, 사실상 남은 선택지는 하나님 외에는 없었다. 나의 온몸과 정신과 영혼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었다.

해답이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나에게 질문이 물밀듯이 흘러들어왔다. 하나님은 진짜 어떤 분이신가? 도대체 나의 삶에 무엇을 말하고 계신가? 나는 질문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형식적이었던 말씀 읽기와 스스로를 속이고 기만하는 기도의 위선을 떨쳐버리고자 노력했다. 나는 이왕 그리스도인이 된 거 말씀을 제대로 연구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자고 각오했고, 가식과 수치를 모두 떨쳐 버리고 주님 앞에 솔직히 기도하자 각오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주님과 나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기도였기에 창피할 일도 없었다.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생각했다.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에 관해 질문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경뿐 아니라 관련된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정리하고...

나에게 하나님의 응답은 어느 한순간에 기적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성경이나 책을 읽을 때면 행간에 파고드셨고, 내가 고민과 질문에 빠져 있을 때 나의 생각의 틈새로 들어오셨다. 아주 미약하지만 나의 시선과 관점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매우 놀라운 경험이었다. 영적인 시선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하자 나의 이성과 감성과 영성이 새롭게 깨어나며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번 깨어난 영적 시선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먼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날마다 내 삶의 깊은 내면에 찐득찐득하게 들러붙은 죄악들이 들여다 보였다. 나는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주님께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십자가의 사랑을 조금씩 다시 알게 되었고, 죄로부터의 자유가 무엇인지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변화는, 나의 시선이 나 자신에서 타인에게로 조금씩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늘 냉소적인 시선으로 타인을 재단하던 나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평생 형식적이던 중보기도에는 애통과 긍휼이라는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고, 나의 마음은 타인을 향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영적 시선은 나의 수레를 돌아보게 했다. 뒤돌아본 수레는, 지금껏 너무 많은 나의 욕망을 짊어지고 날라서인지, 무척이나 낡아 있었고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리고 이제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결사적으로 거기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했다. 공허를 밀어낼 무언가를...

나는 그게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것들을 열심히 채워나가려 노력했다. 그렇게 또 한 세월이 쌓이자 나의 수레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수레가 하나님으로 한번 채워지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들이 생겼다. 조그맣던 수레에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을듯했다. 그리 넉넉지 못해 보이던 공간에는 가족, 친구, 그리고 이전에 내가 태우지 못했던 교회, 이웃과 같은 타인들을 태울 수 있는 공간이 날마다 새롭게 확장되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이따금씩 내 수레는 덜컹거리고, 아직까지의 난 타인의 짐을 실어주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제는 내 수레를 나 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는 자신의 수레가 한 대씩 있는 것 같다. 때론 끌고 싶지 않아도 끌어야 하는 수레이다. 때론 삐걱거리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각자의 인생이 마무리되는 그 순간까지 끈기 있게 나의 짐뿐만 아니라 서로의 짐을 나누어 싣고 최선을 다해 끌고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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