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소설
시월(十月)이 시작되는 아침.
따스한 가을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상쾌함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출근길이었다. 언제나처럼 이십여 분 거리의 사무실을 향해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는데, 앞서가는 젊은 아빠와 채 다섯 살도 안돼 보이는 어린 아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아빠의 출근길에 아들을 유치원 같은 곳에 데려다주는 듯했다. 착하디 착하게 생긴 젊은 아빠는 어린 아들을 조금 앞서 나가며 달리는 시늉을 하고 있었는데, 이따금 아이를 휙 하고 뒤돌아보며 세상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뒤따라가는 어린 아들은 유아용 킥보드에 올라타 연신 오른발을 굴려대며 아버지를 열심히 따라잡다가도, 갑자기 아버지가 뒤돌아보면 그대로 멈추어 서며 까르르 웃어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소가 끊이지 않는 이들 부자의 즐거운 놀이를 지켜보던 나의 귓가에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랑스런 구호가 맴돌아 들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
사실 술래 역할을 맡은 아버지가 외쳐야 되는 놀이 구호지만 어린 아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스스로 구호를 외쳐대며 술래와 따라가는 아이의 역할을 모두 담당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기꺼이 아이의 즐거움에 동참하여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아이의 즐거운 외침은 아마도 아버지와 오래도록 놀이에 빠져 즐거워하고픈 아이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듯하였다.
아마도 이 놀이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이 놀이가 가지는 묘미 중 한 가지는 구호를 외치는 술래는 거의 예외 없이 말 끝을 느리며 긴장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술래에게 다가가는 아이들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다"라는 외침에 잔뜩 긴장하면서도 감출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살금살금 다가가기 마련이고 행여나 타이밍을 놓쳐 멈추지 못하면 그대로 잡히고 만다.
다소 안타까운 것은 최근 글로벌 히트를 친 영화의 강한 인상 때문인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구호가 왠지 정겨운 긴장감보다는 공포스러운 압박감을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나의 귀를 정겹게 울리던 아이와 아버지의 즐거운 외침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기만 하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놀이들은 대부분 긴장이라는 불안요소를 즐거운 흥분으로 변화시켜 주며, 재미뿐 아니라 서로를 향한 '함께'라는 감정을 쌓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다"라는 마지막 한 단어를 늦춰가며 서로 간의 긴장과 연결을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은 아마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연대를 담아내는 간절한 소망일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즐거운 놀이의 추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내 기억력의 한계도 있겠지만 내 머릿속 유년 시절의 아버지는 늘 일에 지쳐 밤늦게나 귀가하시어 잠자던 나를 슬쩍 쳐다보고 가시던 어두운 실루엣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고된 삶을 견뎌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아버지들의 흔한 모습이었지만, 오늘 즐겁게 부자간의 정을 나누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미 돌아가신 지 3년이나 지났지만, 어린 시절 나누지 못한 부자간의 정을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이라도 서로 마음을 트고 나누었던 것이 나의 인생에는 너무나 감사한 경험이었기에, 아직도 마지막 "다"를 외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너무 감상에 빠진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그리워하고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친구도 만나고 연인도 만나고 가족도 이루어 가길 원한다. 아마도 그 시작은 부모와 자식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 마지막 "다"를 외치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날이 오는 순간까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진행형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더해본다.
오늘 저녁에는 아이들에게 외쳐봐야겠다. 가족들의 어이없는 웃음이 자명해 보이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외쳐봐야겠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