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의 미학
아이를 셋 키우면서 집안을 돌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나는 전업주부이므로 요리, 청소, 빨래 따위의
집안일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야속하게도 집안일은 해도 티가 나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단박에 표가 난다.
여러 집안일들 중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정리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있는 것.
우리 집의 모든 물건은 저마다 제자리가 있다.
아주 작은 약봉지 하나까지도.
각을 맞춰서 일렬종대로 세워두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저 그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가 다
메겨져 있는 것이 편리하다.
물론 아이들이 계속해서 물건을 어지럽혀도 나는
계속해서 묵묵히 그것들의 제자리를 찾아주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있을 때 비로소 아이들을 돌보던 요리를 하던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런 집안에서는 내 몸도 어디에 붙여야 할지
모르게 돼버리고 만다.
심지어 잠들기도 어렵다.
'여보. 좀 앉아. 좀 가만히 있어.'
내가 남편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이런 나를 '강박증'이라고 부른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은 그래서 당신이 편리했다면 단순히
'이상하다'라고 단정 짓지 말아 주시길.
정리할 수밖에 없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나도 정리하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그 누군가를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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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가진 강박증적인 증상이 몇 가지 있다.
계단을 오를 때 숫자를 세고 횡단보도 건널 때
흰 줄만 밟는 그런 시시한 것 말고.
운전 중에 보이는 번호판의 숫자를 간단한 산수를
이용해서 1부터 10까지 만드는 것.
아이들을 재우면서 꼭 600초를 세는 것.
목표량이 세워지면 월 단위 주 단위 일 단위로
수치화하는 것.
아이들이 울고 떼쓰다 나도 소리치고 싶을 때는
숨을 참고 30까지 세는 것 등등
거의 모든 행동이 숫자와 관련되어있다.
숫자는 정직하다. 정직한 것은 뒤탈이 없으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또 정해진 숫자 안에서 정해진 행동을 하면 숫자는 늘 비슷한 결괏값을 내어준다.
참 편리하다. 편리한 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 정해진대로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나는 변수에 약하다. 임기응변이라는 항목은 나에게 없다.
그럴 때면 내가 가본 아주 멋진 곳을 떠올려본다.
단번에 떠오르는 아주 멋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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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번화가 사이에서 고고하게 서있는 오래된
곳이다.
상호를 밝혀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간판,
니스칠한 나무 진열장과 커다란 추가 달린 괘종시계가 있는 곳.
주변 상가에서는 최신 가요가 쾅쾅 흘러나오고 온갖 유행이랄 게 넘쳐나도 혼자서 세기말을 살아가고
있는 약국이다.
그 약국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채운 모든 약들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여 보면 약 이름을 읽을 수
있도록 세워져 있다.
크기별, 종류별, 모양별로 나란히.
그리고 조제실에서 유유히 나오는 약사가 있다.
약사는 복약지도를 위해 계산대 근처까지 걸어
나오는데 아마 그 걸음수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한 8걸음쯤.
오래됐지만 규칙적으로 드라이클리닝 한 가운에는 필기체로 이름이 수 놓여 있고 옷깃은 풀 먹인 듯
빳빳하고 희다.
그는 일단 계산대 옆에 서서 약봉투를 정확히 두고 말없이 봉투의 빈칸에 펜으로 채워나간다.
식후 30분 아침, 점심, 저녁. 체크 체크 체크.
그리고 약봉지를 펼쳐 내 앞에 놓는다.
'자,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식후 30분 후에
드시는 겁니다. 약을 먹는 동안은 술은 드시면
안됩니다. 이 약에는 무슨무슨 성분이 있기 때문에 어떤 어떤 약과 같이 드시면 안 되고 너무 졸리실
때는 이 알약을 빼고 드시면 됩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약 한 알 한 알에 대해서 아주 심도 있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진열장에 규칙적으로 꽂힌 약들처럼
그 계산대 앞에 두발 붙이고 서있는 것이 내가 할
일이며, 약사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곳이 그가
정리한 내 자리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정리'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임으로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쁜 마음으로 약사의 말을 경청한다.
아마 경청까지도 나에게 정해진 일일 것이다.
약사의 복약지도가 끝날 때까지 서있다가 계산을
하고 가볍게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철문을 열고
나가면 내가 그곳에서 할 일은 끝이 난다.
이 곳은 내가 가본 아주 멋진 곳이다.
잘 정리된 약국.
주변 상황뿐만 아니라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면 가끔 그 약국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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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여의사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강박증적인 사고는 잘 컨트롤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장점으로 이용할 수 있어요.
본인에게도 주변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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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뒤늦게 대학원을 간다고 했을 때 우리의
경제적인 상황은 넉넉지 못했다.
아이가 둘, 외벌이.
나는 자신 있는 것을 적용하기로 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학비 오백만 원을 모으기
위해서 한 달에 저금할 돈과 지출할 돈을 나누고
지출할 돈을 주 단위 일단위로 나누면...
하루에 만 원.
만원.
만원으로 하루 식비를 쓰는 것은 4인 가족에게는
참 부족한 액수였다.
하지만 나는 잘 참고, 참는 것도 나에게 정해진
일이므로 꾹 참았다.
남편이 해야 할 과제 같은 것도 월 단위 주 단위
일 단위로 설정해주고 자주 물어봐줬다.
임기응변에 강한 남편이지만 '매일매일'이라는
것에는 약한 사람이다.
내 장점이라고 했으니, 장점으로 주변을 좋게 할 수 있다고 그 의사가 그랬으니.
그렇게 남편은 작년 가을 박사학위를 수료했다.
강박의 미학으로 이겨낸 참으로 긴 긴 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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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국은 지금도 안녕한지.
나는 오늘도 잘 정리된 집에 앉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안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