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H
살면서 우울한 날들이 있다.
정말 못 견디게 우울하고 그래서 잠이 쏟아지는
날들
거기에 나의 오랜 친구 H가 있었다.
우리는 우울한 여름을 함께 보냈다.
그때는 날마다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나 자주 울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머그잔에 물이 맺혀 테이블을
자주 적시는 것처럼 우리도 마주 앉아서 자주 울었다.
그러다 겸연쩍어져서 다시 하하 웃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그 카페에는 오래 일한 직원이 있었는데 아마 지금도 우리를 맨날 우는 이상한 여자들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그때 H는 매일 같은 야구모자를 쓰고 쪼리를 신고 나오는 취준생이었다.
"면접을 보러 가는데 혹시 빌려줄 만한 옷이 있어?"
애석하게도 내 옷장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면접을
위해 빌려줄 만한 옷이 없었다.
내 옷장에 적당한 옷이 없는 것이 꼭 친구의 낙방에 일조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나는 어디 면접을 본 적도 없고, 배 불뚝이 임산부일 뿐인데.
긴 긴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이 아주 길게 기억되는 것은 변함없이
매일 같은 카페에 다녔기 때문이고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자꾸 뒷걸음질 치는 듯했기 때문이다.
-
그날도 H를 그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은 그저 하릴없이 울지 말자고
다짐하며 근처 아웃렛으로 향했다.
배 불뚝이 임산부가 여성복 매장에 들어서자 점원은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나는 친구가 면접에 입고 갈 만한 흰색 블라우스를 열심히 골랐다.
"이걸로 주세요."
-"손님이 입으시게요?"
내가 이걸 입을 리가 없잖아. 알면서도 한번 반문하는 점원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오늘은 울거나
속상하지 않기로 한 날이니까 꾹 참고.
응원을 위한 날이니까.
"아니요. 선물할 거고요. 제일 작은 사이즈로 주세요."
사이즈 고민할 필요 없이 제일 작은 사이즈를 사다 주면 잘 맞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H가 비쩍 마른 것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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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만난 H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 입고 좀 더 힘내서 면접 잘 준비하자."
우리는 다른 날보다 그날 좀 더 많이 울었다.
매일 우는 이상한 여자들이라고 그날도 그 직원은 생각했을 것이다.
-"고마워."
그러다 친구의 핸드폰이 울렸고, 면접에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정말이지 영화 같은 날이었다.
살면서 빛나는 순간을 꼽으라면 이 날도 잊지 않고 말하겠다.
그렇게 긴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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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H는 출근하게 된 직장을 과도한 업무와 박봉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결혼도 하고 무려 공무원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매일같이 만나지는 못하지만
어쩌다 만날 때 야구모자도 쪼리도 없이 예쁜 차림으로 나오는 친구를 보면 그것이 나에게도 큰 행복이 된다.
못 견디게 우울한 날들 뒤에는 즐거운 날도 분명히 있을 거라, 힘겨운 누군가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지만 나에게 그럴 용기는 부족하다.
그래도 그게 공평하지 않겠냐며,
그 해 여름을 넌지시 얘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