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가을, 겨울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 입구로 통하는 지하 1층으로 나와 좁다란 산책로를 걸어 내려가다 보면
도서관에 도착한다.
아주 금방이라 걷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문 앞에 서게 된다.
그 도서관의 책들은 애석한 건지, 다행스러운 건지, 거의 새 것이라 그것을 처음으로 펼치는 나로서는 약간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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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빌려갈 책은 813.7082 젊 68문
쭈그리고 앉아 검색한 책의 청구기호를 속으로
읊어가며.
젊 68 젊 68 68
문 문 문 문 거리다
813.7082 젊 68문을 뽑아냈다.
젋68문 만으로는 아쉬워 두 권을 더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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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빌려 읽는 일은 아주 오랜만이다.
전에 살던 곳에서 도서관은 차로 30분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난 그 도서관 옆에 사는 게 꿈이었다.
꿈.
늘 도서관을 나설 때면 그 도서관 옆 쪽문으로
손쉽게 쏙 들어가 버리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저걸 당연시하겠지. 대수롭지 않겠지. 아니 아주
생각하지를 않겠지. 몇 보만 걸어서 다시 집으로
쏙 들어가겠지.
쪽문으로 쏙.
수많은 -겠지 를 만들다 그게 부럽고 얄밉고 또
슬퍼져서 빌려 읽는 일을 그만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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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하반기에는 한 달에 20만 원 가까이 책을 산 적도 있었다.
내 책을 사고 아이들 책도 사며 장바구니에 길게
달린 책 리스트를 한 번에 탁 결제했다.
정말 탁. 하고.
그렇게 결제 해 버리고 나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과소비였다.
남편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 죄책감이 들지도, 누구에게 자랑해도 눈살 찌푸려지지 않는 소비였다.
장을 보면서 유통기한 덕에 할인 스티커가 붙은
두부를 살지언정, 먹고 싶은 과일을 카트에 넣었다 뺄지언정.
완전한 새것으로.
책을 빌렸다가 쪽문을 보며 돌아오지 않고, 온전히 내 맘대로 쥐락펴락 했다가 책 장에 꽂아두면
그걸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던 2019년
가을과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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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고책을 사지 않아. 새 책을 샀더라. 뭐하러.
너는 헛 돈을 쓰네.
그런 눈치를 받은 적도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른 일이라면 내 성격에 백번 주눅 들만했지만
오히려 내 쪽에서 그를 깔볼 수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나는 플레티넘 회원이며, 그런 건 또한 희열이었다.
어떻게든 찾아낸 치졸하고 어딘가 구질구질한
희열과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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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이라는 버튼을 아무렇게나 누르고 내려와서
집 근처 도서관 정문에 섰더니 내가 이 문 앞에 온 게 이사온지 일 년 만이라는 걸 알았다.
일 년 만에.
아니 일 년이 아니고 몇 년에 걸쳐서 이제야.
쪽문으로 쏙 들어갈 수 있게 된 나는 얼마나 당연스레 산책로를 걸어 내려왔는지.
인터넷 서점 회원 등급은 강등되어 '실버'인데 그게 또 얼마나 아무렇지 않은지.
청구기호를 찾으며 도서관에서 여유를 찾는 나는
또 얼마나 간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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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과 겨울에는 목 뒤가 뜨거워지고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쫓기듯 책을 읽었다.
소설이던, 에세이던, 역사책이던, 육아서적이던,
무엇이든지.
그게 잘 포장된 울적한 도피였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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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온 책이 새 책인데,
청구기호가 테이프로 붙은 내 것 아닌 새책.
빌려온 새 책을 읽고 있자니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래. 당연한 건 하나도 없어.
그걸 얼마간 잊었던, 쪽문으로 쏙 들어갔던
내 뒤통수가 밉다.
탁 때려주고 싶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