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들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세종시로 이주를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내는 어서 빨리 시골로 내려가자고 재촉했습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특별'이 붙은 세종특별자치신데 시골이라고 말하면 되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상처를 주는 건 사람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골은 도시보다 상처가 적을 것입니다. 들을 보며 자라서 사람 많은 곳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아내는 말합니다. 어디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데 뭐가 힘드냐고 말을 하고선, 아, 아니구나!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출장을 이유로 일 년의 삼분의 이 이상을 나그네처럼 밖에서 살았구나. 집으로 돌아온 주말에도 컴퓨터 앞이나 소파 위에서 닭처럼 졸기만 했었구나. 부끄러운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데, 가슴이 아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일과 함께한 시간보다 적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삶의 질이란 물질이 아니라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을 보며 자란 아내에게 고향 들녘의 평온함을 찾아주고 싶습니다. 들처럼 너른 마음을 내보이며, 기꺼이 어깨를 내밀어 주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보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집에서 난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어. 그냥 애들 뒷바라지하고 남편 밥 차려주는 사람인 건지. 당신도 애들도 잘 가고 있는데, 나만 안 그런 거 같아."
아내도 자신을 보배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들이, 딸이, 남편이 당신의 보배인 것은 맞지만, 그들에게 아주 귀하고 소중하며 꼭 필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당신은 '보배의 보배'인 거지. 나 자신을 보배라 여기고 소중하게 대할 때 남들도 그렇게 대하는 거야. 그리고 보배는 가만히 두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공을 들여 가꾸는 거라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 드디어 보배의 보배가 빛납니다.
사람을 선물이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내가 더 배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내가 더 성장하니까. 힘든 사람이 나타나면 나를 돌아보고 깨달으라는 신호이고, 편안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살펴보고 배우라는 신호라 그렇답니다. 이렇듯 사람이 선물이라는 조정민 목사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내가 지나친 선물들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포장지를 벗기고 무언가를 꺼낼 수 있었는데, 그냥 흘려보낸 만남들이 오늘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나를 수취인으로 지목했음에도, 차마 열어보지 않은 만남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만남들을 선물로 받아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후회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선물'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이었는지를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기꺼이 선물이 되어 사람들을 찾아가자고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