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문도 막히고 귀도 막히고
❚내 전공은 비밀
영어 회화 학원이나 영어 학원에서 영어 전공하는 학생들은 절대로 전공을 밝히지 않는다. 나도 그런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자기 소개할 때 거짓말은 할 수 없어서 은근슬쩍 전공을 말하지 않곤 했다. 나의 전공을 밝히는 순간 ‘근데 넌 왜 영어가 그 수준이야?’라고 말 할 것 같았다.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나 자격지심은 나의 전공 때문에 생겼다. 영어쟁이로 살면서 평생 달고 살아야할 자격지심일 것 같다.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금은 제법 얼굴에 철판도 깔고 영어가 나의 모국어가 아님을 인정하며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덕분에 이제는 원어민들과의 대화를 할 때도 울렁증 같은 건 없다.
❚기가 막혀, 귀가 막혀, 말문도 막혀
나의 영어 울렁증은 사실 대학교를 입학할 즘 아주 심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제일 자신 있던 과목이 영어였다. 나는 스스로 영어를 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교 영어 전공자로서의 자질을 조금 더 연마해야겠다고 좀 더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다.
고3 겨울 방학동안 ‘영어회화 쯤이야’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내 영어 회화 학원을 등록했다. 평생 처음으로 간 영어 회화 학원의 첫 날 첫 수업에 한국인 강사 선생님은 듣기 파트로 수업을 시작하셨다. 긴 영어 뉴스 같은 것을 들려주고 받아쓰기를 하라고 시켰다. 고등학교 영어 시험에 듣기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듣기는 말하기에 비해 완전 엉망이진 않았다. 그런데 내 귀에는 덩어리 채 들릴 뿐 그 덩어리 소리를 영어 단어로 분리해서 받아 적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무슨 소린 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게 될 친구는 술술 다 받아 적었다.
다음으로 강사 선생님은 각자 자기소개를 영어로 간단히 해보라고 했다. 받아쓰기로 멘탈이 흔들린 상태에 생전 처음으로 남 앞에서 영어로 말해보라는 그날의 미션은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귀도 막히고 말문마저 막혔다. 내 영어 실력의 민낯을 본 그날 나는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고등학교 내내 죽어라 영어 공부만 했는데, 내가 영어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영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지? 내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거였나? 무슨 자신감으로 영어를 제일 잘 하는 과목이라 했던가? 정말 나 스스로에게 할 말이 없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영어라고 다 같은 영어가 아니다. 영어는 그 안에 아주 다양하게 분류된다. 쉽게는 아카데믹 영어, 생활 영어, 비즈니스 영어 등으로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스킬이나 어휘 등이 다르다. 물론 듣기/말하기/읽기/쓰기의 네 가지 기능은 다 존재하지만 영어가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익혀야 할 부분이 참 서로 다르다.
고등학교때 내가 죽어라 연마한 것은 아카데믹 영어의 읽기 영역이다. 하지만 영어 회화 학원에서 요구한 것은 아카데믹쪽 영어가 아니라 생활영어였다. 게다가 말하기와 듣기 영역이었다. 내가 익히지 않은 영역이었기에 영어회화 학원의 첫날 수업은 예견된 참사였다. 그래서 그날 어렴풋이 ‘여태 내가 한 영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진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날 이후 내가 결핍된 실용 영어에 완전히 올인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석사니 박사니 그런 학위를 위한 공부는 절대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20대인 나에게 지금의 내가 박사공부까지 할 팔자라고 귓속말을 했으면 아마 기겁하고 부정했을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실용 영어 쪽으로 완전히 영어 공부의 방향을 전환했다. 이제까지 접하지 못한 실용 영어를 제대로 한번 배워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의 영어 공부 방향은 급전환되었다.
❚뭐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실용영어에 중점을 두고 막힌 귀와 막힌 말문을 트기 위해 나의 영어 공부 루틴을 짰다. 대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무렵 교사 임용시험 준비를 시작할 때까지 다음의 공부 루틴을 잘 지킨 것 같다.
❋매일 EBS 초급, 중급 영어 회화, 모닝 스페셜 청취(풍부한 인풋은 영어 학습에 절대적이다)
매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라디오를 청취했다. 새로운 표현은 노트에 꼼꼼히 적었다. 그리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노트를 들고 외우는 유난까지 떨었다. 지금처럼 유튜브가 없었으니 나의 노트가 유일한 리소스였다.
❋영어 청취반 수업(안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영어 듣기가 잘 안 된다는 것은 모르는 어휘나 표현이 많거나 안다하더라도 음성언어로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다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시트콤 ‘프렌즈(Friends)’는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청취반 수업은 캐나다에서 온 한국계 강사가 가르쳤다. 빠른 대사 하나 하나를 다시 듣고 설명을 듣는 식의 수업이었다. 그 강사는 한국말과 영어를 어찌나 잘 하는 지 내 눈에 너무 너무 부러웠다. ‘나처럼 진심으로 영어 공부를 한다고 해도 국내에서는 한계가 분명히 있구나.’생각했다. 나중에 나의 아이는 나처럼 비효율적인 영어 공부는 안 시켜야겠다고 어렴풋이 다짐하기도 했었다.
❋매일 영어 회화 학원 수업 (연습이 제일 중요하다)
말하기에 자주 쓰이는 문장을 통째로 달달 외워 최대한 영어 학원에서 써먹으려고 애썼다. 영어 회화학원을 매일 다녔다. 상대의 이야기나 질문이 완벽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들리는 만큼 이해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최대한 하려고 애썼다. 어쩌면 나의 대답이 동문서답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회화학원의 스몰 톡(small talk)이니 엉뚱한 대답이었던들 별 상관이 없다.
❋영어회화 동아리(나의 관심분야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선한 영향력 주고받아야한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동아리 방에 머물렀다. 대학시절 내내 동아리 친구들과 영어 스터디 그룹을 꾸려서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렇게 즐겁게 영어를 익혔다. 여기서 남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하는 경험도, 영어로 스피치 하는 경험도, 영어로 연극하는 경험도, 영어로 행사 진행하는 경험도 모두 겪을 수 있었다. 같은 관심사로 모인 선배 후배들 사이에서 좋은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그 동아리 멤버들 중 친하게 지내던 선배는 현재 영국에 이민을 가서 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미국에서 박사와 포스트 닥터 과정을 마치고 의과대학교 교수를 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글로벌한 마인드를 은연중에 서로 공유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달 캐나다 어학연수(말만 할 수 있다고 그 언어를 한다고 할 수 없다)
대학교 3학년 여름 방학에 그간 쌓은 내공을 실험도 할 겸 문화도 체험할 겸 한달 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갔었다. 교실 영어와는 사뭇 다른 현지 캐나다 사람들의 영어는 또 한 번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문화적인 배경지식이 없다보니 그들의 말이 더 안 들렸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일례로, 평생 처음으로 가 본 외국 여행이다 보니 택시기사에게 팁을 주는 것도 낯설었다. 친구와 택시를 탄 적이 있다. 우리는 미터기에 있는 요금만큼 돈을 주고 내렸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자꾸 뭐를 더 바라는 눈치를 주며 안 가고 거기 서있는 거였다. 뭐를 바라는 건지 알 길이 없이 우리는 그냥 쌩하니 택시를 내려 집으로 와버렸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니 그 기사는 우리가 팁을 주기를 기다렸다는 거였다.
결국 겪어보지 않고 딸랑 표현만 달달 외운 나의 영어는 문화의 벽에 가로 막혀 버렸었다. 여담이지만, 그 한 달 간 캐나다 어학연수 중에 남편을 만났다. 일 년 간 배낭 여행을 하던 남편이 내 눈에는 왠지 다른 문화에 대단한 적응력이 있어 보였다. 결국 그로부터 20년 후 남편과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 유학을 저지르기로 했다. 5년간의 미국 유학기간동안 겪은 다양한 문화적 경험은 언어 발달에 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함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부분이었다.
❋노트정리(공부의 필수 아이템은 바로 정리다.)
모든 상황을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하려는 습관이 거의 몸에 베였다. 머릿 속으로 흘려보는 영어라도 막히는 부분이나 영어로 어떻게 할지 모르는 부분은 바로 사전을 찾아봤다. 사전을 찾아 새로운 영어 표현을 알게 되면 길가다가 지폐 한 장 줍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최대한 잊기 전에 내 정리 노트에 담아 두곤 했었다. 그렇게 쌓인 나의 청춘 영어 공부 노트는 여러 번 이사와 미국 유학준비과정에 분실되어 너무 안타깝다.
❚입은 살렸다
대학교 입학을 한 이후 거의 3년간 꿈도 영어로 꿀 만큼 영어에 미쳐있었다. 영어 전공자니 당연한 일이겠지 싶지만, 사실 같은 영어 전공자라도 사람마다 목표치가 달랐다. 누구나 자신이 필요한 분야의 영어를 필요한 만큼만 노력하는 게 맞다. 그 당시 나는 유학을 생각할 처지가 못 되었기에 토플 공부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토익 공부와 영어 말하기 시험 대비를 관심 있게 했었다. 경기도 교육청은 그 당시 이례적으로 교사 임용고시에 토익 점수 가산점을 줬다. 그리고 현재 내가 근무하는 교육청은 말하기 시험 성적 가산점을 줬다. 두 지역을 염두해 둔 상태라 나는 두 가지를 다 준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듣고 말하기를 중점적으로 연습한 덕분으로 나는 말 그대로 “입은 살렸다”.
❚‘영어로 글쓰기? 그까이거 대충 우리말을 영어로 바꾸면 되는 겨~’라고 할 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나의 영어는 ‘입만 살았다’로 표현이 될 듯 하다. 교사가 되고 나서 우연히 6개월 영어 심화 연수를 참여한 적이 있었다. 전국의 영어 교사들이 6개월 간 숙식을 같이 하면서 영어 의사 소통 능력 향상을 위한 심화 연수를 했다.
그 당시 쓰기 수업 강사는 캐나다 사람으로 실제 작가 활동을 하는 분이라고 했다. 수업 초반에 글쓰기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듣고 매일 각자의 주제를 가지고 모여서 글쓰기를 했다. 그리고 후반 후에는 자신이 쓴 글을 서로 읽어봐 주며 피드백을 주는 식이었다. 나의 글을 읽은 선배 선생님께서 나의 글은 글이 아니라 그저 “재잘거림”같다고 하셨다. 문체가 너무 캐주얼하고 중심 생각이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사실, 당시에는 살짝 기분이 상했으나 지금 되돌아보면 정곡을 찌른 조언이었다. 교사가 되기 전까지 영어로 글쓰기를 잘 해야 하는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영어로 글을 써야하는 상황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지하게 영어로 글 쓰는 것에 완전 초보였다.
막힌 귀와 막힌 입은 어찌 해결이 되었는데, 이젠 생각을 영어로 된 글로 조리 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상황이 펼쳐졌다. 사실 이 능력은 그 짧은 6개월의 연수로는 길러지지 못 했다. 나의 영어로 글쓰기 실력은 미국 유학 기간 석사 박사 과정을 할 때 키워졌다. 남들이 평생 쓸 영어 글쓰기를 그 4년 반 동안 다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매번 쓰고 또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생각의 정리가 먼저여야 하므로 자신 있게 ‘뭐 든지에 대해 영어로 글 잘 쓸 수 있어요’는 지금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제는 영어로 글쓰기를 요청 받아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방법은 안다.
지금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초보 작가이지만 글쓰기의 세계는 무궁무진한 것 같다. 영어로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 유학 시절 나의 지도 교수님은 글쓰기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당시에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말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게 나의 요즘 취미인 걸 보면 나도 그 교수님처럼 글쓰기를 참 좋아하게 된 사람인 듯 하다.
❚열공, 열정 모드가 다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나의 대학교 영어 공부는 나의 결핍 분야를 보충하려 열심이었다. 실용 영어를 듣고 말하는 위주로 방향을 잡고 최선을 다했다. 매일의 루틴을 세워서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 당시 나의 영어 공부 방법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열공, 열정 모드로 한 나의 대학 시절 영어 공부였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더 효과적인 영어 공부 방법에 대해 다음 글에서 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