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영혼이 찾아서 들었던 음악들
모니터 안에 붉은 글자로 선명하게 찍혀있는 $30.
왜 내 은행 계좌에서 30달러의 과태료가 빠져나간 건지 멍하니 앉아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32살, 이제 미국에 온 지는 햇수로 3년째. 하고 싶던 공부를 위해 유학은 왔으나 모든 것이 내 생각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국과는 너무 다른 시스템, 불안한 신분, 너무 비싼 집세와 학비 등 나를 옭아매는 모든 것들에 허덕이고 있을 때쯤 은행 계좌에 뭔가를 잘못했는지 벌금이 30달러가 빠져나갔다고 쓰여 있었다.
뭘까. 뭘까.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동안 쌓여온 좌절감과 답답함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밀려오며 분노에 휩싸이고 있을 때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Personal Check, 미국에서 현금 대신 본인이 발행해서 돈을 보낼 수 있는 개인 수표. 이걸로 며칠 전에 공기관에 보낸 120달러. 기한이 아직 좀 남아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벌써 빼간 것이었다. 은행의 잔고가 부족해서 나는 벌금을 맞은 것이었고. 당시에 일하던 리쿼 스토어에서 주급 날이 가까웠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늦지 않게 입금을 해 놓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이 꼬인 것이다.
120달러, 당시 환율로는 한국돈 12만 원이 조금 넘는 돈. 이게 없어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갓 돌 지난 아들과 아내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짓인가 하는 회의감이 너무 강하게 밀려와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피아노 공부하러 왔는데 돈 버느라 급급해서 연습도 제대로 못 하고 출석만 겨우겨우 하고 있는 현실도 한심스러웠고.
가장 힘든 건, 이 상황이 나아질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실도 캄캄하고, 미래도 캄캄한 방향을 찾을 수 없던 그 시절.
한국에서 즐겨 마시던 소주 한잔 마시며 마음을 달래 보고 싶었지만, $5.99 하는 소주가 너무 비싸 돌아서야 했던 그 시절.
마음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듣고 싶어 졌었던 곡들이 있다.
https://youtu.be/-_brPf510eA
들국화의 곡들은 예전부터 좋아했지만, 이 곡이 아닌 다른 곡들을 더 좋아했었는데 답답한 상황에 놓여있게 되니 나는 왜 여기 서 있냐며 울부짖는 전인권 씨의 목소리는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해서 많이 듣게 되었다.
내가 들국화라는 그룹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재미있는데, 90년대 중반, 강변역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두 여성분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고 나서이다.
“나는 들국화가 너무 좋아”
“그러니까 은퇴할까 봐 걱정돼 죽겠어”
“전인권은 마약을 해도 괜찮고 도둑질을 해도 괜찮으니까 노래만 계속했으면 좋겠어. “
도대체 전인권이 어떤 사람이길래?라는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대화 아닌가. 그렇게 알게 된 들국화였고 그렇게 알고만 있었는데 상황이 바뀌니 노래들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https://youtu.be/464Ux-B_5uY
워낙 비틀스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레논의 몽상적인 곡들은 묘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면이 있다. 그의 앨범을 사고, 사진을 벽에다 붙여놓기도 했었다. 요즘 그 아들놈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 부모에 그 자식이 아닐까 싶어서 후회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 음악이 그리 좋았다.
자꾸 뭔갈 떠올려보라는 저 노래 가사가,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고만 싶던 상황에 자연스레 듣고 싶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는 이 곡만 자꾸 치게 되었던 것 같다.
https://youtu.be/qnEfzOHdOXM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19살 때 작곡했다고 하는데, 그 젊은 나이의 청년이 어떻게 이리도 깊은 슬픔과 절망을 음악에 담아낼 수 있는지. 그의 타고난 우울감이 고스란히 담긴 화음 하나하나의 색깔과 멜로디와 모든 것들이 너무 좋았다. 마치 분출하듯이 이 곡을 계속 쳤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음악에 위안을 받는다고 생각지 않았다. 음악을 듣다가도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바로 당면한 현실들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힘들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음악을 찾아서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하며 연약한 내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어떻게 버텨서 공부를 끝낸 것을 보면
‘음악보다는 내 지갑 속으로 들어오는 한 장의 지폐가 더 큰 위로이다’
라고 우겨대던 강퍅한 마음속에도 음악은 슬며시 스며들어 무언가 변화를 일으켜 놓았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