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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Sep 30. 2020

그저 빛바랜 것들

1.

날 것의 삶은 어떤 이유로 사진이 되고, 또 어떤 이유로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댄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가요. 가진 것 중에 가장 비싼 것을 찍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사진으로 남기기도 할 것입니다. 일하고 있는 책상 위나 셀프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겠네요. 매일 둘러보는 SNS에는 그런 사진으로 넘쳐납니다. 내가 오늘 먹은 맛있는(혹은 맛있어 보이는) 음식, 새로 산(또는 선물 받은) 물건, 큰 맘먹고 간 휴가 사진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사진이 됩니다. SNS가 전단지고, 우리의 몸이 전광판이라면 아마 그런 것들로 자신의 삶을 꾸미고 보여주는 것이겠죠. 누군가는 사진의 순간적인 속성을 이용해, 스스로를 과장해서 표현하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보통은 자신의 삶에서 그나마 나은 것을 고르고 골라 올려둡니다.


2.

날 것의 삶 중에 사진이 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신도 알 겁니다. 낡아서 구멍 난 잠옷이나 먼지가 잔뜩 앉은 전공책, 어제 차마 치우지 못한 설거지 거리나 침대 위 애착 인형 같은 것들이요. 더러운 차 뒷좌석이나 때맞춰 빨지 못한 오래된 운동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그토록 반짝이는 것은 많지 않아요. 매일 맛집을 돌아다니기엔 삶이 너무 버겁고, 빠듯한 월급으로 늘 새 제품을 살 수도 없지 않나요. 그래서 우리는 드물게 찾아오는 것에 카메라를 드는 거겠죠. 그럼에도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사진이 되지 못한 모든 낡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빛이 바래 그 형태가 우스워도 그것이 일상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3.

부모님은 1989년도에 지어진 아파트에 삽니다. 나와 동갑인 아파트는 아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몇 년 전부터 주민들 사이에 재개발 이야기가 돌기 때문입니다. 원금을 갚을 수 없어 몇 년을 월세와 전세로 전전하다가 겨우 들어온 집입니다. '여행한다, 공부한다'며 밖으로 떠돈 시간이 길어 고작 5년 산 기억이 전부인 아파트입니다. 그럼에도 집 계약을 마치고 돌아온 부모님이 '너와 동갑인 아파트를 샀다'라고 뿌듯해하던 그 날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나와 그 아파트는 매일 같은 시간을 먹고사는 생각을 합니다. 오래 알았지만 친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은 친구처럼 나는 이곳을 탐색합니다.


4.

느지막한 오후에 담배를 피우며 거닐면 새로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낡고 빛바랜 것들이에요. 아파트 관리 소장은 재건축을 진행하자며, 아파트 가격을 높이자며 이곳저곳 단장하기 바빴을 겁니다. 그런 부지런함에도 손길이 채 닿지 못한 곳도 있어요. 나는 이 아파트의 날 것을 발견할 때마다 작은 기쁨을 느낍니다. 어쩔 수 없이 낡은 것, 지난 시간을 지탱해온 것, 일상의 가까운 부분이 된 것을 찾아낸 것 같아서요. 아마 부동산에 걸린 사진에는 새로 칠한 외벽 사진이 주를 이룰 겁니다. 이곳을 심사하러, 계약하러 온 사람들도 단장한 예쁜 모습만 눈에 담아 갈 겁니다. 하지만 내 카메라엔 그들에게 없는 사진이 쌓여갑니다.


5.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런 낡고 빛바랜 것을 찾아 나섭니다. 겉은 바랬어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자체로 산 증인이 됩니다. 시간과 사건을 목격한 묵묵한 증인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오래된 아파트를 닮은 일상을 찍습니다. 가까이 닿아 거뭇해진 벽지가 보이기도 하고, 유행 지나 먼지만 빼곡하게 쌓인 물건을 찍기도 합니다. 2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삶을 지켜온 부모님의 가게에 깊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났을 뿐, 여전히 그대로 사랑스러운 것들을 남깁니다. 비록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사진 못할 지라도, 오래 사진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뿐입니다.


6.

하지만 낡은 것만 좇자는 흔한 생각이 아닙니다. 요즘의 레트로 유행은 나의 세대에서 경험할 수 없어서 낯선 그래서 남들과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역시 낯설기 때문에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낡음은 익숙함일지도 모릅니다. 빛바램마저 익숙해진 일상. 그것이 사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 일상이 사진으로 잠시나마 특별한 지위를 얻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와 당신의 삶을 지켜주는 것들, 숨겨진 이야기를 하는 것들에게 전하는 작은 선물처럼 말입니다.


7.

아마 우리가 사진으로 남기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도 결국 빛바랜 채 우리 곁을 지킬 겁니다. 새로운 인연도, 새로운 물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프레임 밖으로 벗어날 겁니다. 사진이 뭐 별거 있겠냐만 그래도 우리 가끔 일상에 눈길을 주기로 해요. 사진으로 남겨두기로 해요. 빛나는 것들의 사진은 그저 빛나는 것을 증명하는데 그치지만, 낡고 빛바랜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그저 빛이 바랬을 뿐, 쓸모없지 않다는 것을 당신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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