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돋보기 01
아니, 논문을 뒤집었더니 곰국이라는 그런 이야기 말고,
진짜 곰국.
사라 제시카 파커와 휴 그랜트가 나오는 '들어는 봤니? 모건 부부 Did you hear about the Morgan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뭐 말하자면 진짜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재미없는 영화입니다. 중간중간에 한 세트에서 촬영해서 이어 붙이기가 확실한 재탕 삼탕의 코믹 씬들을 그냥 이를 악물고 보고 나서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 시골 어딘가에 가면 정말 곰이 그렇게 많은가 보다 하게 되어요. 배경은 뉴멕시코 주의 로이라는 곳이 배경이고, 영화 중반부터 이곳에서 펼쳐지는 말도 안 되는 생활이 등장합니다. 영화 내내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곰을 안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곰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등, 그냥 곰에 대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나옵니다. 곰=비 문명화된 시골 이런 등식인 거죠.
캘리포니아도 만만찮게 곰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죽하면 캘리포니아의 주기에도 곰이 등장할까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리스, 새크라멘토 등 큰 도시들도 많고, 여기서 곰을 만날 일은 없지만, 사실 주 전체에서 도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적다 보니 곰 주의 표시를 흔히들 볼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주요 국립공원들, 특히 미국의 보물이라고 일컫는 요세미티에만 가도 곰 조심하라는 경고는 위치를 불문하고 나타나며, 저렴한 주택을 노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의 증언에도 곰을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먹을 것이 적어진 산기슭에는 곰이 인가로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뉴스로 나옵니다. 러시아가 불곰국이라고 불리는 것만큼, 미국 자체만 놓고 보면 곰 나라라고 불릴 만한 곳이 바로 캘리포니아인 셈이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곰을 소재로 한 다양한 기념품들도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웬만한 국립공원에 가면 호랑이나 반달곰을 소재로 한 기념품이 한두 가지 정도는 있는 것처럼, 캘리포니아의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것은 이 곰을 소재로 한 장식품입니다. 특히 주립/국립 공원중 산이나 수풀을 끼고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곰이 그 주인공입니다. 곰 머리를 조각한다던가, 곰 발자국을 무늬로 놓는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곰의 발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곰발바닥을 떠서 장식품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뿐 만이 아니라, 곰이 긁어놓은 것 같이 생긴 무늬를 기반으로 패턴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이 나라에는 곰에 관련된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요세미티 하프돔을 밀어내고 당당하게 주인공이 된 그리즐리 베어
아시다시피 곰은 외모에서 풍기는 포근함과,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는 친근함과는 달리 상당히 무서운 포식자입니다. 지능을 갖추고 있기도 하고, 체력도 엄청납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곰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글리즐리 베어는 보통 성인 사람의 키보다 10-20센티는 더 큽니다. 상징적인 곰 앞발 공격을 인간이 정통으로 맞았을 때는 얼굴과 머릿 가죽이 벗겨진다고 하죠. 곰 발바닥에 있는 세균으로 인해 살아남더라도 상처가 심하게 부패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요. 우리는 푸우 덕분에 곰이 꿀만 먹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잡식성으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네. 채식, 육식이 아니라 다요. 요세미티 국립공원 등에 가면 홍보용 TV에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곰을 만났을 때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보다는 조용히 벗어날 것, 음식물을 보이는 곳에 두지 말 것, 자동차 등에 향이 강한 물건 (방향제등)을 두지 말 것,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도 철로 만들어진 상자로 만든 것만을 사용할 것 등 곰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는 경고 영상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이 민가에 내려오거나, 관광객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여 불상사가 생기는 일은 빈번합니다. 곰의 생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불필요한 곰의 죽음, 흥분한 곰으로 인해 안타깝게 희생되는 사람들 모두 불행합니다. 얼마 전 제가 묵고 있는 타호의 한 지역에서도 집을 잠시 비운 사이, 테이블 위에 둔 점심 거리의 냄새를 맡은 곰이 민가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투숙객이었는지 집주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집에 사는 사람이 호신용 총으로 곰을 쏘기 시작했고 결국은 곰이 죽고 말았습니다. 총을 쏜 사람도 위협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다행이긴 했으나, 곰이 얼마나 공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동시에 어쨌든 짐승의 생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어느 쪽을 옹호하든 기분이 좋지 않은 일 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SNS를 통해 민가에 내려온 곰을 맨손으로 쫓은 17세 여성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아기 곰들을 몰고 나온 어미곰이었기 때문에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만, 어쨌든 민가로 들어온 상황이라 개들이 짖어댔고, 그중 덩치가 작은 한 마리는 어미곰에게 낚여가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강아지의 주인인 헤일리 모리니코가 달려들어 곰을 밀치고 강아지를 품에 안고 도망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후 강아지 주인인 소녀는 TV와의 인터뷰에서 맨손으로 곰을 공격하는 것은 정신 나간 일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약간의 긁히는 상처가 있었다고 하면서요.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에서도 곰은 아주 중요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정말 곰이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곰을 숭상하던 계파가 호랑이를 숭상하던 계파에 대항해 승리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죠. 곰이 세냐 호랑이가 세냐 같은 우월성을 다루는 언쟁은 있을 수 있어도, 우리는 곰을 더 친근감 있게 여기는 것은 이견을 가질 수는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곰을 사랑하는 것만큼, 곰에 정말 진지한 지역, 캘리포니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