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의 도시
서현이 자신을 데리고 간 빌딩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으리으리해 보였다. 건물 입구에 **로펌이라고 건물 벽에 새겨져 있었다. 주현은 변호사나 법조계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이 로펌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던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더 익숙했던 이유는 외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현이 유학을 가 있는 동안 부모님을 통해서도 이 로펌에 대해서 한 두 번 들었던 것 같았다.
건물을 찾아오기 전보다 건물 안에 들어왔을 때 길을 더 잃은 것만 같았다. 건물을 찾아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를 아는 곳을 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적지를 모르는 곳을 가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이 회사에서 해야 하는 일은 윤도진을 아는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그냥 알기만 하면 안 됐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이 반지를 갖다 줄 수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 했다. 이 넓은 회사에서,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인사팀.. 뭐 그런데 가서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8층인가 거기서 일했다고 했는데.”
서현과 주현은 안내데스크 앞에서, 하지만 딱 안내데스크라고 할 수 없는 어물쩡한 거리에 서서 건물층별 안내도를 보고 있었다. 8층에서 일했다는 걸 알았어도 8층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주현은 대책이 없는 이 상황이 지끈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서현도 뚫고 나아가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서현씨?”
남자 목소리였다. 서현을 부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고 양복 마이에는 변호사 배지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사원증이 걸려있었다. 주현 위치에서 이름 전체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도 ‘민호’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다. 키는 꽤 커 보였다. 서현의 근처에 와서 섰는데 그 남자는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언니의 옆에 서면 웬만한 남자들이 다 작아지는 느낌이 받았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주현은 생각했다. 아주 잘 생긴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멋있었다. 큰 키에 좋은 목소리에 변호사라는 직업, 그는 이미 스스로 프라우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주현의 시선은 언니에게로 돌아갔다. 서현은 단박에 알아본 것 같았지만 자신을 위해 아주 잠시 누군지 고민을 하는 것만 같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금방 인사를 이어갔다. 주현은 이 와중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다행이라고도 생각하면서 어렸을 때 자신이 언니한테 ‘하나님이 알려줬어?’라고 물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이 순간도 그런 순간일까 싶은 마음에.
주현과 서현은 회사 로비 한 쪽에 가지런히 마련되어 있는 카페에 앉아서 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이 플라스틱 투명 잔에 얼음이 가득 채워진 채로 놓여있었다. 서현은 뭐라도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아무 표정도 없이 그냥 앉아있었다. 주현은 오늘 아르바이트가 저녁 6시라는 게 속상했다. 사람이 새벽에 하는 생각이 가장 올바르고 판단력이 있는 생각이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언니와 최대한 빨리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하루 첫 시간의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더더욱 강렬하게 들었다. 민호라는 사람에게서 정보를 받아가면 바로 받고 감사하다고 하고 나가자, 그리고 그 다음에 언니가 어떻게 할지는 상관하지 말고 집으로 가자. 알바는 뺄 수 없다고 말하자, 주현은 민호를 기다리는 동안에 이어서 계속 생각을 했다.
잠시 후 민호가 한 손에는 자신의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메모를 들고 두 자매에게로 걸어왔다. 민호의 인기척을 먼저 느낀 건 주현이었다. 서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주현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서현은 민호 쪽을 돌아보았다. 민호는 서현의 앞으로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도진이 미국 주소에요. 지난 주에 출국했어요.”
“항상 미국에서 일하고 싶어했어요. 고마워요.”
서현은 포스트잇을 보더니 자신과 주현의 사이에 내려놓았다. 주현은 혹시나 싶어서 포스트잇에 있는 주소를 핸드폰으로 찍었다. 그러면서 주현은 서현의 거의 처음 듣는 사회적인 목소리 톤과 제스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서현이 도진을 대하는 모습은 평소 자신이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 좀 더 차분해 보였고 목소리도 더 중저음이었다. 주현은 언니의 목소리가 좀 허스키하다고 느낄 때가 있긴 했지만 중저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순간은 중저음이었고 약간 카리스마가 있게 느껴졌다.
민호는 서현을 한 번 보더니 주현을 한 번 쳐다봤다. 주현은 민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대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 사람을 우연히 마주친 게 진짜 큰 복이라고 생각했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불편했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민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진이가 미국을 가면서 서현씨한테 이야기를 안 했어요?”
“아 그게-“
“걔도 참, 의사소통이 원활하지가 않죠? 변호사를 어떻게 하는 지 모르겠어.”
“…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보단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안하게 잘 못하는 것 뿐이죠.”
“에이, 그게 그거죠.”
주현은 이 사람이 언니와 윤도진이 헤어진 걸 모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윤도진이라는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두 사람은 친구인 거 같은데 파혼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미국으로 간 건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언니와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 버린 건가? 민호를 마주하면서 윤도진, 그 사람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는 않긴 한 가 보다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을 언니가 어떻게 만났을 지, 왜 만났을지도 궁금해졌다.
맥도날드에서부터 주현은 서현에 대한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만 같은 느낌이었고 거기에 아무런 저항도 대항도 하지 못하고 실패한 기분이었다. 언니는 항상 자신을 실패자처럼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자신을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주현은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해결책을 물어볼 수도 있고,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언니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림에 대해서는 선뜻,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선뜻 그게 되지 않았다. 괜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숨기려고 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보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할 거라고 생각 못했다. 서현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하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신의 그림을 올려놓았던 건, 뭐랄까, 스스로의 가치를 판단 받고 싶은 마음 절반, 사람들에게 하트를 받으며 격려를 받고 싶은 마음 절반이랄까. 그런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었던 거였다. 언니가 보게 하려고 했던 것이 절대 아니었는데 바보 같이 그 부분을 계산하지 못한 게 스스로 황당했다.
그런 마음이 성수동에서부터 여의도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해결이 되지 않았다. 안 그런 척 했지만 언니는 느꼈겠지. 지하철에서는 주현은 서현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현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는 상황에서 민호라는 사람이 언니와 도진과의 관계를 하나씩 들춰내니 자신이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현은 도진을 변호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민호는 도진과 친한 관계일까? 아니면 친한 듯 뒤에서 그를 깎아내리는 사람이었던 걸까? 친한데 그의 약혼녀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떠오르는 물음은 많았지만 할 필요는 없었다.
주소를 받았으니 이제 이 회사에서 볼 일은 다 끝난 것이라고 주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서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감사해요.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도움이 되어서 감사하죠.”
세 사람은 일어섰다. 주현과 서현은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고 도진도 인사했다. 도진은 자신의 테이크아웃잔에 든 커피를 들고 테이블을 빠져나가는 것 같이 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췄다. 가방을 챙기던 주현은 도진의 발걸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다시 두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아 그런데 서현씨, 이건 전부터 서현씨한테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