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식었고, 말은 덜 식었다

자매의 도시

by Yun

주현은 서현을 쳐다봤다. 주현처럼 갈 채비를 하던 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민호를 쳐다봤다. 민호는 자신이 앉아있었던 자리에 앉았고 서현과 주현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도진이가 이야기를 하면 좀 들어주세요. 묵살하지 말고.”

“묵살이요?”

“으음- 기분 나쁘게 듣지 마요.”


묵살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민호는 서현이 고양이처럼 뜬 눈으로 되묻자 아주 약간 당황했는지 커피를 내려놓고 두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커피를 삼키느라 아니라는 말을 못하고 으음-이라고 소리를 내는 게 주현은 기분이 나빴다. 주현은 생각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고 하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큼 기분이 나쁜 말이 없는데.


“서현씨가 진취적인 것은 장점인데 다른 사람 말을 안 듣잖아요.”


민호라는 사람은 서현을 보면서 무슨 연설이라도 떠벌리듯, 강의라도 해주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주현은 직감했다. 이 자리를 금방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언니가 가만히 있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한 편으론 이번에는 언니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그런 행동을 하는 건지 좀 속을 들여다 봐주면 좋겠어요.”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신 거에요?”

“음, 예를 들면 도진이가 썬캐처인가 뭔가 들고 왔더라고요, 한국에 올 때.”


썬캐처라는 단어에 아메리카노에 고정이 되어있던 주현의 시선이 민호에게로 옮겨졌다. 이쯤 되니 그 썬캐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는 서현씨가 만든 거라고 해서 그 녀석 준 건 줄 알았어요. 근데 집에 와서 걸어두지도 않더라고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도진이 때문에 만든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그걸 왜 들고 왔냐고 물어봤는데.”

“뭐래요? 왜 들고 갔대요?”


서현은 민호의 말을 낚아챘다. 주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는 않고 빨대로 얼음을 빙빙 돌리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봤다.


“대답 안 했어요.”


서현이 민호를 정말로? 라는 눈빛과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니 민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에요. 예뻐서- 라고만 했거든요. 나중에 서현씨 서울에 오면 돌려 줄 거라고 했어요. 근데 미국으로 가지고 간 건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네요. 아, 내가 이 이야기 하면 안 되는 건가?”


민호는 진짜 자기가 말을 실수했나?라는 생각이 같이 든 거 같았다. 그냥 말이 많고 허세가 많은 사람이라고 주현은 생각했다. 확실한 건 그 썬캐처는 도진 때문에 만든 건 아니었다. 근데 정말 도진 때문에 만든 게 아니었을까?


“근데 그건 진짜 도진이 때문에 만든 게 아니에요? 도진이 말로는 서현씨 그거 만드는데 엄청 오래 걸렸다던데.”

“그 사람이 영향이 없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서현씨, 들고 가게 해놓고 이유도 모르고, 나름 중요한 거 같은데 어떻게 됐는지 행방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근데 이렇게 되는 이유가 서현씨가 남의 말 잘 안 듣고 관심을 갖지 않아서 그런 거에요. 도진이 같은 애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진짜 어려운 사람들이잖아요. 변호사 일을 한다는 것, 변호를 한다는 건 정말 일일 뿐이고 소통을 하거나 자기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것들은 다른 영역이니까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제가 서현씨랑 도진이를 이렇게 보면 도진이가 자기 이야기를 편안하게 서현씨한테 못하는 거 같아요. 무슨 말을 해도 서현씨는 듣지 않고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느낌이랄까. 때론 별로 상관도 안 하는 거 같아요. 로마에서 함께 일을 할 때도 보면 추진력은 좋은데 다른 사람들 얘기는 잘 안 듣더라고요. 능력이 좋아도 그런식으로 행동하면 사람들이 안 좋아해요. 솔직하게 말하면 도진이가 서현씨한테 헤어지자고 할까봐 걱정이라고, 약혼까지 한 사이에 –“


촥-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아메리카노와 얼음이 가득 찬 잔이 민호의 방향으로 쏟아졌다. 순간 민호는 옷을 버릴 까봐 의자를 뒤로 쭉 밀면서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현도 순간 깜짝 놀란 얼굴로 테이블을 쳐다봤다. 그리고 민호를 봤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옷을 확인하고 테이블을 확인한 후 잔을 쏟은 사람에게로 가는 민호의 시선을 따라갔다.


잔을 쏟은 주현도 놀라서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서현과 민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현은 커피가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지지 않았다. 그냥 빨리 이 지루한 대화를 끝내고 밖에 나가서 언니한테 제대로 밥을 사라고 해야 겠다 생각이 들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의외였던 것은 서현은 민호의 말에 화를 내지도, 버럭 반박하지도,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게 익숙하다는 느낌으로 가만히 있는 거 같았고 주현의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 언니가 서현답지 않게 그냥 당하고만 있는 건가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잔을 쏟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간을 망가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주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엄청난 속도로 올라왔다. 속도가 있는 느낌으로 훅 하고 올라왔다. 주현은 무언가를 망가트리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 순간은 그것이 간절했다. 먼저는 언니에게 이렇게 떠들고 있는 이 사람의 말을 망가트리고 싶었고, 그 다음은 이런 상황까지 자신을 끌고 온 서현을, 그리고 서현과 함께 있기로 택해 놓고 수없이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뒤집고 싶었다. 민호의 말이 점점 말도 안 되고 논리에도 안 맞고 함부로 떠든다는 생각이 확신이 되자 주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 순간 얼음이 녹아 표면에 물이 잔뜩 맺힌 잔에 있던 손은 그 물방울들과 함께 균형을 잃었다.


“죄송해요, 순간 손이 미끄러져서! … 아, 티슈 갖다 드릴게요.”


주현은 허둥지둥거렸다. 한 모금 정도 마셨기 때문에 잔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얼음이 녹고 있었으니 쏟아진 양은 사실 티슈로 되지 않을 것이다. 주현은 티슈를 가지러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세 네 걸음을 걸을 때까지는 저 쏟은 물을 해결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컸다. 하지만 카운터로 가까이 걸어갈 수록 주현은 이 걸음이 맞는 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왜 자기가 다급해야 하는 걸까. 이 상황에서, 저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상관이 없는 것은 주현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을 하지 않는 서현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민호의 무례함도 화가 났지만 그것을 그냥 받고 있는 서현도 화가 났고 더 화가 난 것은 서현은 그런 걸 그저 받기만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진작에 그 사람 말을 자르고 주현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주현은 카운터 근처까지 갔지만 티슈를 집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서현과 민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근데요,”


주현이 말하자 서현과 민호는 주현을 쳐다봤다.


“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따뜻한 거 시켰어요.”

“예?”


민호의 얼굴에 당황함이 묻어나왔다. 자신의 바지에 묻은 커피를 털고 있던 민호는 그 구부정한 모습으로 주현을 쳐다봤다. 주현은 계속해서 말했다.


“따뜻한 거 시켰는데 이게 나와서 그냥 있긴 했는데요, 근데 나 진짜 따뜻한 거 시켰는데. 그렇지 않아 언니?”

“뭐?”


서현도 좀 당황한 얼굴로 주현을 쳐다봤다. 주현은 언니의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언니의 이런 표정은 자신에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언니도 나 때문에 그런 표정 좀 지어봐.

주현은 사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한 잔에 5000원이나 하는 커피인데 얼음만 가득했고 잠시 지나면 그 커피맛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물이 많이 생겼다. 주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차가웠다. 몸에 전기 같은 자극을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커피까지 나온 상황에서 불편한 자리를 계속 이어가야 했고 말도 안돼는, 나만 욕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가, 처음 보는 사람이 말도 안돼는 말을 퍼붓고 있는 걸 듣고 있어야 했다. 더 많은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주현은 서현에게 시선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봤다. 서현의 얼굴은 오늘 하루 중 가장 당황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막상 그 얼굴을 보니 그렇다고 기분이 그렇게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주현은 서현의 뒤를 지나 자신의 자리에서 에코백을 챙겨서 민호를 쳐다도 보지 않고 나갔다.

서현은 갑작스러운 주현의 행동에 자신의 물건을 하나씩 챙겼다. 가방, 쇼핑백, 그리고 포스트잇. 주현을 부르며 따라 나가려던 차, 서현의 눈에 민호가 보였다.


“아무튼 고마워요. 잘 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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