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May 19. 2023

"나를 추앙해요"

모두 가 버리고 by 에바 린드스트룀

 지칠 일 없이 지치는 어느 날

내 마음이 딱 이런 것 같다.

지독한 가뭄이 계속되던 끝에 말라버린 논바닥, 금이 쩍쩍 갈라져 있는 상태!

이런 생각이 섬광처럼 퍼뜩이며 번쩍 일었을 때, 마른땅에 촉촉한 단비처럼 메마른 내 마음에도 넘치도록 충만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를 안아주세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처럼 간절하면서도 다급한 외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동안 떠먹여 주는 미디어 방식에 익숙했던 내겐 썩 친절하지 않아서 장면과 대사를 곱씹게 되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하루하루가 고단해 보였던 여주인공 염미정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마치 시위라도 하듯 '나를 추앙해요'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염미정은 제법 업무감각이 뛰어난 실력 있는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직장 상사가 작업물 수정을 요구하며 지시하는 방식이 흡사 비난이나 무시에 가깝고, 도를 넘는 듯한 갑질 횡포로 보이지만 미정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묵묵히 회사를 나와 근처 카페에서 작업물 수정작업을 하게 된다.


당신과 함께 여기 앉아서 일하다고 생각하면 이런 그지 같은 일도 아름다운 일이 돼요. 견딜만한 일이 돼요.
연기하는 거예요. 사랑받는 여자인 척,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여자인 척,
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으며 그래서 편안한 상태라고 상상하고 싶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 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간 말라죽을 것 같아서
당신을 생각해 낸 거예요.
언젠가는 만나게 될 당신
적어도 당신에게 난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겠죠.
누군지도 모를 당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만나지지도 않는 당신,
당신, 누구일까요?

외침 같은 독백을 하듯이 아우성 같은 침묵을 하던 그녀가 절규하듯 그러나 지나치게 차분한 모습으로 말한다.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깐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난 언제라도 채워진 적이 있었던가?

  '사랑이 많고 따뜻한 사람, 베풂이 DNA에 장착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서 안간힘을 다해 살아왔기에 남들에게 이렇게 인정받고 있다고 믿었는데 왜 공허한 걸까?

충만했던 사랑이 말라버린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채워진 적이 없었던 걸까?

 어쩌다 이리도 지독하게 마른 가뭄이 들도록 나를 내버려 둔 걸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의 부재?

미움받고 있다는 불안함 기습?



 

 지금 당장이 아니면 안 될 만큼 간절하게 배우고 싶은 것이나 대략적인 장기 플랜을 세운 것이 아님에도 불현듯 장기 휴직을 결정한 이유가 어쩌면 사십춘기처럼 찾아온 이것이었음을 6개월이 지난 이제야 희미하게 알아차리는 중이다. 이 알아차림을 통해 내가 나와 대면하는 시간을 힘겹게 갖고 있는 과정에도 브런치에서는 계속 알람이 울려댔다.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무려.. 120일이 지났어요 ㅠ-ㅠ

작가님 글이 그립네요.. 오랜만에 작가님의 시선이 담긴 글을 보여주시겠어요?

.

.

.

.

.

[글 발행 안내] 작가님의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오늘은 일상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을 차분하게 글로 정리하는 브런치 타임을 가져 보세요.


 지난날 내게 글쓰기란 내 영혼에 숨을 불어넣고 삶에 활력과 힐링이 일어나는 환희의 시간들이었는데 어쩌다 이토록 글쓰기와 단절된 일상을 이어가는 걸까?

그 시작을 더듬어보면 오른쪽 손목과 어깨 부상으로 장기간 팔걸이 깁스를 해야 했던 상황으로 다소 불편한 일상을 감수하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글 쓰는 일을 멈출 만큼 큰 부상은 아니었다. 날마다 새로운 글 발행 버튼을 누를 수 있을 만큼 글쓰기에 열심을 내진 않았어도 호흡과도 같은 글쓰기에 스스로 위로를 받았던 내가 불편해진 일상을 핑계로 어쩌면 게으름을 합리화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보다 더 몇 달 전 에세이스트 모임에서 당시 글쓰기에 누구보다 열심을 냈던 분의 글이 오랫동안 뜸하길래 많이 바쁘신 건지, 당신의 글을 계속 기다리고 있다며 안부를 물은 적이 있었다. 본인은 워낙 완벽함을 기하는 성격이라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글을 쓸 때에는 미완성의 글을 발행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때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몸이 얼어붙는 것 같고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쩌면 나는 나를 위한 글쓰기에 홀로 취해 있었던 건 아닐까? 글의 완성도가 부족하고 청자를 염두하지 않은 채 일기인지 독백인지 장르 없이 끼적인 글이 누군가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한 채 망설임 없이 글을 발행해 온 내가 짧은 생각에 폭력을 휘두른 것 같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랬나 보다.

더 이상 글 쓰는 일이 내겐 자유로운 산책이 될 수 없었고 스스로를 점점 더 동굴로 파고들게 만들었나 보다.



 코로나 이후 오프라인 모임이 없던 터라 5주년을 맞게 되는 독서모임은 금산에 있는 지구별그림책마을로 북스테이를 다녀오자는 의견에 과감하게 1박 2일로 다녀오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북큐레이터 아저씨께서 [첫 번째 질문]이라는 그림책을 읽어주셨는데 은은하게 들리는 배경음악 위로 깔리는 그림책 이야기를 통해 뭔가 잔소리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방식이 아닌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받는 경험을 나누게 되었다. 이후 모임에서도 별책부록처럼 그림책 읽기를 꾸준히 이어나가고 싶다는 의견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였고, 내 차례에는 에바 린드스트룀의 [모두 가 버리고]라는 책을 함께 읽어보았다.


* <<모두 가버리고>>

이 그림책 속 주인공 프랑크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상처 입은 아이다.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어울리지 못해 눈물 흘리는 아이. 친구들은 언제나 재밌고 즐겁게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기만 늘 혼자인 것 같아 외롭고 서러운 마음에 집으로 온 아이는 마음껏 눈물을 흘린다. 그 흐르는 눈물을 냄비에 담고 설탕을 넣어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오랫동안 저으며 끓인다. 눈물의 마멀레이드 잼이 다 만들어졌을 때 빵도 구워보고 곁들일 차를 준비한 뒤 창문을 열고 친구들을 찾아본다. 그런데 사실 친구들 역시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가버린 프랑크가 신경 쓰여 그의 집 창문 아래 모여있다. 프랑크는 갓 구운 빵과 눈물의 마멀레이드 잼을 들고 친구들이 있는 마당으로 나가 함께 먹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 프랑크가 준비한 빵과 눈물잼을 함께 먹었다고 해서 금세 친구들과의 사이가 좋아지거나 서로 간의 서먹함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어릴 적 우리가 익히 보아온 동화처럼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해맑기만 한 해피엔딩을 기대할 순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크고 작은 관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갈등이 커지기도 하고 서로 조금씩 노력하면서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더 예측하기 쉬울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날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경험하면서 스스로 변화하는 성장의 지점을 우리들은 응원하고 싶은 게 아닐까? 누군가 나를 채워주길 바라며 나를 추앙하라고 외치고 싶은 용기로 눈물의 마멀레이드 잼을 만들며 함께 나누고 싶은 친구들을 기다린다.

 


작가의 이전글 햇빛이 위험한 세상이 온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