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며칠 전 ‘인사이드 아웃 2’ 영화를 보고 왔다. 전작'인사이드 아웃'이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기에 개봉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끈 영화이지만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예고편에 ‘사춘기’가 된 주인공이 나온다는 이야기에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막내를 살살 달래어 함께 극장으로 갔다. 평소막내아들은 영화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극장에 가는 것도 일 년에 한두 번뿐.. 하지만 이번엔 너에게 필요한 영화라고 아주 재미있다고 닦달하는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극장으로 향했다. 이제 4학년인 녀석은 작년과 다르게 가끔씩은 버럭 하거나,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등 살짝 사춘기 근처를 다가가고 있어서 내심 걱정이 되던 차였다. ‘사춘기’에 관한 영화를 보고 나면 더 느끼는 게 있으리라 생각되어 함께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고 아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오히려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영화의 선택은 막내 때문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오히려 나를 뒤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다. 내 안의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실 축구를 하고 싶다거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건 최근에 들어서 갑자기 생각난 일들은 아니었다. 축구경기를 보던 작년부터 실천에 옮겨보려고 네이버에서 ‘김포 여성 축구단’을 찾아보기도 하고, 카페를 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집에서 멀기도 하고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찾아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실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저질체력에 공도 다룰 줄 모르고 축구화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무턱대고 찾아가서 함께 하고 싶다고 하면 오히려 우스워보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만 많아질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날들이었다. 글을 쓰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지만, 다른 누군가가 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앞서왔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쓰고 싶은 것이 일기인지 에세이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어야 하는 건데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막연히 ‘하고 싶다’라는 생각만으로 가득 찬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의미 없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 살 한 살 나이만 더 먹어가는 모습이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기회’가 생겼다.
그때 마침 나의 눈에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여자 축구교실’이 오전에 있다는단비 같은 글이 보였다. 내가 갈 수 있는 딱 좋은 시간이었다. 브런치를 켜서 짧은 글을 몇 개 끼적이고 있을 때 ‘브런치 작가교실’이 열린다는 글을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댓글을 달고 있었다. ‘분명 이건 기회다!’
평소의 나는 소심하고 생각이 많은 편이다. 물건을 하나 살 때도 필요한 것을 미리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며칠을 고민하고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하면서 신중히 선택하려고 한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도 말릴 수 없을 만큼 돌진할 때가 있다. 아마도 살면서 그렇게 돌진한때는 몇 번 없을 것이다. 축구교실과 글쓰기교실을 보았을 때가 그랬다. ‘이건 바로 돌진해야 하는 때인 거야’ 놓치면 안 되는 다시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나는 두 가지를 참여했고, 그 시간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이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 이전의 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축구교실이니 글쓰기이니 하면서 원래의 내 모습에서 달라지려고 하고 있는 걸까? 거기에 또 다른 도전할 일이 없는지 이것저것 기웃거리기까지 하고 있다니.. 나 자신이 분명 뭔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 같다. 어디에선가 머리를 세게 부딪힌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달라지고 있을까? 나도 해답을 찾을 수 없어서 남편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내가 요새 미쳤나 봐 왜 이것저것 안 하던 것들을 하고 다니는 걸까?”
남편의 대답은 단순 명쾌했다. “그냥 하고 싶었나 보지”
사실 천천히 생각해 보면 축구교실을 가는 것도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내가 가는 축구교실에는 나 외에도 많은 엄마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히려 나보다 더 열정적이다. 축구교실이 끝나고서 연습을 더 하기도 하고, 다른 팀들과 매치를 하면서 실력을 키워가고 있다. 하나의 축구교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사람들은 또 다른 축구교실까지 다니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 축구교실에서 나는 가장 신입이기도 하고,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다.
즉 가장 실력도 없고, 체력도 되지 않는 신참이 나의 현실이었다. 인터넷으로 축구교실을 찾을 때 분명 내가 사는 지역에 축구교실이 없었는데 (나의 어설픈 검색 실력 때문인지) 하나의 축구교실에 들어와 보니 우리 지역에 무척이나 많은 여자 축구 교실이 있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루는 다른 축구교실에서 배우러 온 사람들도 함께 훈련을 하고 게임을 해보았는데 정말 따라가기도 벅찰 만큼의 스피드와 개인기에 감탄만 연신하고는 끝낸 적이 있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보다도 더 똑똑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멋진 지식과 경험을 유려한 글솜씨로 뽐내고 있고 책을 출간하고 있다. 평범한 아줌마인 내가 글을 쓴다고 한들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너무 뻔하고 재미없고 정보도 없는 글이라면 사람들이 관심도 없을 텐데 왜 이리 열심히 쓰려고 하는 걸까? 정말 굴곡진 삶을 살아서 너무 힘들었지만 이겨내었다는 글도 아니고, 그냥 나의 일상이야기들이 대부분이 될 텐데 난 왜 이리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려고 하는 걸까?
그 해답은 내가 본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여러 캐릭터 중 ‘기쁨이’.
영화 속 기쁨이는 주인공의 기분 중에 가장 먼저 생겨난 감정으로 감정을 조절하는 본부의 리더이기도 하다. 리더로서 주인공의 ‘행복’을 책임지고 그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아마도 나의 기쁨이는 그동안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리더의 역할을 맡았지만 일상에 치여 일에 치여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그냥 조용히 조용히 있어야만 했다. 내가 해보고 싶은 일보다는 가족들의 생각이나 주어진 상황을 먼저 생각해야 했기에 기쁨이는 의견을 내세울 수 없었던 것 같다. 가끔씩은 슬픔이가 리더가 되기도 하고, 버럭이가 혹은 불안이가 리더의 역할을 하면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기쁨이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려고 하고 있다.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내면서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음을 그리고 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나는 축구연습을 하다가 다리 종아리 근육이 찢어져 몇 주째 축구를 가지도 못하고 있고, 내가 쓴 글을 ‘좋은 생각’에 보내보았지만 책에는 실리지 못했다. 쉽사리 잘 풀리지는 않지만 나는 다시 해볼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근육이 다 나으면 다시 유니폼을 입고 축구화를 들고 잔디밭으로 신나게 달려갈 것이다. 재미있었던 일들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로 남겨보고, 다시 ‘좋은 생각’에 보내볼 생각이다. 나에게 온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해보려고 한다. 즐기면서 신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