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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Nov 02. 2022

플로리스트의 정원 1

10월말. 2022. 캘리포니아.

또로로로로록.

조그마한 전기 포트에 물을 채운다. 스위치를 누르고 온도를 맞추니 금새 치이익하면서 물이 데워지는 소리가 난다. 


아이들 등교시키는 일로 더 이상 분주할 일이 없어지게 된 언젠가부터, 또 플라워샾 출근 준비로 바쁠 일이 더 이상 없게 된 언젠가부터, 이 찻물을 준비하는 시간은 나의 아침 의식이고 나만의 아침이 시작되는 소리다. 


1년전 새로 이사온 이곳은, 눈길이 닿는 곳마다 키 큰 덩치좋은 나무들이 서있는 곳이고 언덕 아래로는 자그마한 호수도 보이고 밤에는 많은 별들도 볼수있는 곳이다. 새, 다람쥐, 사슴, 토끼들도 사는 곳이고, 때로는 고라니나 여우도 가끔 보이는 곳이기도 하면서, 아침이면 어딘가에서 꼬끼요~ 하는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닭 울음소리도 있는 곳이다.


포트에서 물이 데워지는 소릴 들으면서, 여러 종류의 티가 나란히 세워진 나의 티 서랍을 연다. 음.. 오늘은 어떤 향으로 하루를 시작해볼까.. 마음이 가는 티 하나를 꺼내 티팟에 한스푼 넣고는 따뜻한 물을 부어 한번 씻어내고, 그 자그마한 찻잎들 위로 다시 따뜻한 물을 부어준다. 쪼로로록.


얼핏보면 그냥 바싹 마른 나뭇잎 부스러기같은 이 조그만 찻잎들은, 어디에 이런 향을 꽁꽁 감추어두고 있는건지. 따뜻한 물이 닿으니 달큰한 꽃내음, 여린 풀, 고소한 아몬드, 옅은 오렌지 향들이 한가득 피어오른다. 따뜻한 차를 한모금 입에 머금으니, 코끝에서 피어오르던 향이 입안 가득 채워지면서 금새 마음과 생각이 차분해지고 깨끗해진다. 아~ 이래서 티를 마시지.. 


이곳에서는 도시에 살때처럼, 사람들의 바쁜 몸짓과 이리저리 달려가는 자동차 풍경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는다. 이곳에선, 뭘 그렇게 쪼아먹을게 있는지 부지런히 이곳 저곳 쫑쫑쫑쫑 옮겨다니며 아침식사를 하는 작은 새들과, 먹을거릴 찾는건지 잠에서 깨서 놀고있는건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폴짝폴짝 옮겨다니는 다람쥐들의 분주한 몸놀림과, 내 정원에 새로 심은 꽃과 나무들을 호시탐탐 노리며 방문하는 사슴들의 여유로운 발걸음들로 하루가 시작된다.  


도시는 삶의 공간, 산과 숲은 휴가 가는 곳으로 생각될 만큼 평생 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는, 처음엔 이런 아이들을 눈뜨면 볼수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반가왔고, 더군다나 매우 반짝이는 코를 가졌다는 루돌프 사슴들을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하고 행복해하고 그랬었다. 이 너무나 예쁘게 생긴 애들이 새로 심은 모든 식물들을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건지 알게되기 전까지는.


사슴과의 전쟁모드로 돌입해야 우리가 정원을 이룰수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또 다시 수개월이 걸렸었고, 이제 어느정도 안전한 식물 보호구역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동안 사슴들이 망가뜨린 식물들을 정비해주면서 여기저기 원하는 꽃과 식물들을 마음껏 심고있다.


내 사랑 메이플. 오레곤 해변가에서.

이 아이의 이름은 메이플. 12살 생일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하고, 4년전 우리곁을 떠나간 우리의 소중한 메이플.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몇달을 아주 힘들게 버텨내야했고 어렵게어렵게 메이플을 조금씩 보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문득 눈물 핑 돌 정도로 메이플이 너무 그립고, 그래서 더 새로운 반려견을 맞이할 엄두를 못내고 있는데 아마 시간이 더 흘러도 계속 이럴 것 같다.


대신, 메이플이 떠난 그 빈 자리를 나의 이 정원과 이곳에 심겨진 이 조그마한 아이들이 채워주고 있다 반려정원 반려식물이라는 이름에 딱 맞는 의미로..


도시에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지만, 높은 산자락을 향해 들어서는 이곳은 여름이 끝나면서 아침 온도가 꽤 많이 내려갔다. 아침 이른 시간이면 싸늘해서 간단한 겉옷을 하나 더 걸쳐입고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고는 바깥 정원으로 향한다. 나의 소중한 식물들이 하룻밤새 얼마나 컸는지 잘 잤는지 둘러보러.


차고쪽으로 나오면 앞마당 정원부터 둘러볼수있고, 거실쪽 패리오 문으로 나오면 정원 뒷쪽에서부터 둘러볼수있다. 오늘은 패리오 문을 열고 뒷쪽으로 먼저 향했다. 


대부분 작년에 이사오고 나서 심은 식물들이라 아직 다 어려서, 가득 채워진 정원이 되려면 몇년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주말에도 쉬지않고 힘들게 정말 한땀한땀 심은 아이들이라 한아이한아이 얼마나 소중하고 예쁜지모른다. 


이사왔을때 이곳엔, 앞마당엔 잔디만 있었고, 집을 삥 둘러 자리한 자생하는 나무들외엔 꽃이라곤 꽃나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집 안 이곳저곳을 손보며 우리 스타일에 맞게 고쳐가는 동안 참으로 많은 시간을 또한 이 바깥 정원에 공을 들였다.


플로리스트로 살면서 알고있는 꽃도 식물들도 꽤 많게됬고, 어떤 식물이 어떤 꽃을 얼마동안 피우는지 또 그 시즌이 지나면 어떤 꽃식물이 필요한지, 또 어떤 꽃이 시장에서 구하기 힘든 꽃인지 등등 알게되다보니 내 정원에서 키우고싶은 아이들도 많아서,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거의 매일 매주 땅을 파고 심고 가꾸고 심고 가꾸는, 벗어날 수 없는 체바퀴 정원일이지만 기쁘게 하고 있는 중이다. 


정원에 어떤 식물과 꽃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자라게해야하는지 계획하는 일은 플로리스트 일과 그리 다르지않다. 어떤 환경을 좋아하는지도 가장 먼저 생각해야하는 일이지만, 플로리스트가 꽃의 색감과 질감을 잘 어우러지게 해야하고 높낮이도 보기좋게 해줘야 하듯, 정원을 계획하는 일도 그렇다. 


이제 날이 추워지니까, 올해는 이제 내년 봄에 꽃 피울 구근 몇 종류 더 심는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심는 작업은 못할 것같다. 이번 주말에 수선화, 튤립, 알리움 구근들을 심으려고 하는데 쪼그리고 앉아 심으면서 힘들긴 하겠지만, 찬바람이 아직 가시지않은 내년 초봄, 빼꼼 하고 땅에서 솟아나는 수선화 잎들을 보게되면, 또 조골조골 이쁜 주름을 두르며 피어날 패럿 튤립 꽃잎들을 보게되면, 아 힘들었지만 그때 심길 정말 잘했다 할것 같다. 


또 그렇게 몇년 후엔, 

올해 힘들게 심었던 식물들이 자라서 내 정원을 한 가득 빼곡히 채우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원했던 색감으로 질감으로 잘 어우러지며 아름답게 자라난 아이들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것이고.


군데군데 아직도 피어있는 자그마한 꽃들을 보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못하고, 따뜻한 찻잔이 차갑게 느껴질때까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티가 다 식어 아이스티가 될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한참을 정원에서 머물렀다.




작가 Jamie:

꽃, 자연, 그리고 와인을 좋아하는 Californian


- 미국 플로리스트 협회(AIFD) member & 디자인 심사위원 Certified floral design evaluator/judge

- Wine speci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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