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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희원 Jul 20. 2022

홍콩야자-평안-시

생명은 가만히 자라고, 평안은 차오르는 것

친구들의 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식물은 홍콩야자였다. 꽤 커서 줄기 부분만 내 정강이 길이쯤은 되어 보였는데, 베란다 입구에 서서 동글동글 긴 잎을 수월하게 펼치고 있는 게 어쩐지 유달리 싹싹해 보였다. 초록집이라는 애칭을 가진 이 집엔 이전에도 두어 번 놀러 온 적이 있었지만 이날 방문엔 목적이 있었다. 오늘의 풍경이 작가로 참여하는 전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집 안의 식물을 키우는 공간을 촬영하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초록집엔 세 사람(종종 네 사람)과 한 강아지, 그리고 꽤 많은 식물들이 살고 있다. 귀여운 스탠드 식물등 아래 오종종 모여있는 한 뼘짜리 선인장들과, 컵에서 자라고 있는 바질, 루꼴라들을 지나 베란다로 들어서면 나로선 이름 모를, 하지만 대체로 섬세한 윤곽을 지니고 있는 식물들이 늘어서 있다. 음… 아는 것도 몇 있긴 하다. 로즈마리, 소포라, 아디안텀, 알로카시아, 블루스타 고사리, 저 단풍 같이 생긴 건… 단풍인가?


어쩌다 이렇게 많은 식물과 함께 살게 되셨나요? 방문객의 질문에 주인들이 되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우리는 어쩌다. “…어릴 때부터 집에 식물이 많아서인가?” 여경 씨가 먼저 추론을 시작했다. 이 집에 사는 세 사람 모두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며 본가를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방에서도 식물이 종종 위안이 되어주었지만 잘 키우긴 어려웠다. 식물이 본격적으로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혼자 살던 방을 벗어나 친구들과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특히 신아 씨가 합류하면서였다. “친구들 중에 저 혼자 키울 때는 식물로 공용 공간을 차지하기가 좀 그랬거든요. 신아가 들어오면서 셋 중 둘이 식물을 키우니까 자리가 좀 생겼달까.” 더 결정적인 계기는 어느 날 동네에 생긴 독특한 식물 가게였다. ‘식물성’이란 이름의 그 가게는 오래된 동네의 높은 곳에 들어섰다. “너무 의외의 위치였는데, 이름도 너무 좋고 사장님이 어쩐지 호감이 갔어요. 저희와 왠지 비슷한 느낌? 자주 들르면서 영업도 당하고, 식물이 아프면 물어보거나 맡기기도 하고.” “맞아 맞아. 너 새로 들어온 식물 봤어? 너무 예쁘지 하면서 서로 덕질하고.” 그렇게 키워 온 식물 사랑이 새로 이사 온 집 베란다를 점유하게 된 건, 식물이 차지한 남향의 베란다가 더 많은 식물들을 불러들이게 된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홍콩야자는 신아 씨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였다. “8년은 됐을 걸요? 2012년, 13년쯤 강정마을 투쟁 후원으로 샀거든요.” “신아 씨, 그럼 십 년 전이에요.” “헉 그렇네? 십 년이나 됐네?” 당시 신아 씨가 살던 원룸에는 빛이 잘 안 들었다. 이전에 고시원에 살 때는 더했다. 좁은 집은 우울했지만 종종 선물로 받거나 하는 초록이들이 그때도 위안이 되었다. 신아씨는 이 홍콩야자를 잘 길러내려고 빛이 잘 드는 학과 사무실 창가로 옮겨가며 키웠다고 했다. 지금보다 한참 작은 홍콩야자를 고이 들고 대학 건물 사이를 걷는 신아 씨의 모습이 머릿속에 삽화처럼 그려졌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하하. 내 식물이니까 절대 죽게하지 말아야겠다 싶었어요. 꼭 잘 길러내야지 하면서.” 나는 그 무렵 신아씨의 삶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오늘 홍콩야자의 확연한 멋은 알 수 있었다. 키우기 쉬운 공기정화식물로 곧잘 추천되어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홍콩야자. 유달리 진한 녹색빛이 당당하고 수형도 어엿한 나무 같았다. “쟨 튼튼해서 빛이 덜 드는 거실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신아 씨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신아 홍콩야자한테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처음 알았네. 너무 감동적이다.” “그래? 감동적이야? 와아 얘기하길 잘했다. 하하하”


어떻게 식물을 키우게 되었는지, 식물이 왜 좋은지, 거기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지. 식물 키우기에 대해 무얼 묻든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이 말부터 내뱉었다. “너무 예뻐요.” 아름다움과 향기. 그 느낌을 떠올리지 않고는 식물에 대한 생각은 시작할 수조차 없는 것 같았고, 그런 면이 우리의 대화에 계속 온화한 촉촉함을 더했다. 여경 씨는 식물을 돌보면서 날씨와 계절에 민감해졌다고 말했다. 비가 오면 고사리와 열대 식물들이 기뻐하고 해가 나면 또 다른 식물들이 좋아한다. 일이 마음 같지 않을 때에도, 사회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감내해야 할 때도 식물 덕분에 하루에 한 가지는 좋은 일이 있는 일상이 된다. 물론 잘 돌보지 못하면 시들거나 꽃을 피워내지 못하거나 하는 일도 있지만 정말 가망 없다고 생각했던 식물이 새로운 계절에 당당하게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긴 시간의 힘도 믿게 되었다. 지금 무너져도 다시 좋은 순간은 올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올해는 씨앗부터 기른 식물들도 몇 있었는데 발아하고, 꽃을 피우고, 또 씨앗을 채종하는 일련의 과정을 만나면서 새로운 계절감을 익히게 되었다. 그렇게 싹을 틔워 개화한 한련화의 찬란함은 한참 일이 고되었던 무렵의 신아 씨에게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의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었다. “왜 그렇게 뿌듯했을까? 그게 그렇게 뿌듯하더라고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발등에 뭔가 보드랍고 촉촉한 느낌이 와닿았다. 강아지 도레가 식탁 밑으로 들어와 내 발에 턱을 괴고 있었다. 느낌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도레가 너무 귀여워 경황없이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왜일까. 낯 가리는 강아지가 먼저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왜 이렇게 기쁠까? 나는 신아씨처럼 뿌듯할 것도 없는 방문객인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행복감. 그러니까 경이로움 같은 건 그랜드 캐년이나 우주에서나 느낄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강아지와 식물들을 돌보는 내 친구들의 집에도 경이로움은 있다. 조그맣게. 그렇지만 엄청 많이. 아마 공기 중에 떠다니는 도레의 털만큼 많이.


“그래서 식물들이 있는 베란다에서 받는 가장 큰 가치는 뭐예요? 구체적인 기쁨들에서 한 단계 추상화해서 말한다면요.” 갑자기 답을 내놓으라고 요청하는 이 질문에 누가 먼저 답했는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평안”이라고 말했고 다른 한 사람이 공감을 표하며 “평화”라는 단어를 꺼냈다.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이든 평안함을 늘 유지하고 싶거든요. 그걸 유지할 수 있을 때의 제가 좋고, 주변에도 더 이로워요.” 여경 씨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있었다. 알아요. 안전에 대한 욕구랑은 다른 평안. 풀어지는 게 아니라 내면의 장력을 팽팽하게 당겨서 스스로 고요해지는 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아씨가 말을 이었다. “식물은 정적인데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 있어요. 계속 자라고 있잖아요.” “맞아. 짧은 순간 바라만 봐도 회복되는, 깨끗한 위로?” 몇 년 전에 여경 씨가 만약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요가와 시 쓰기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신아씨는 지치고 피곤하고 좌절스러운 순간에도 식물을 죽이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켜 물도 주고 돌보고 나면 피로감도 회복되고 마음에도 일상에도 어떤 꾸준함이 생겨서 좋다고 했다. 가만히, 소란스럽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이 초록 생명들은 반려인들에게 24시간과는 다른 어떤 시간을 선사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아주 길고, 찰나이기도 한. 몰입과 평안의 시간.


이 날 부재중이었던 초록집의 또 다른 반려인 주온에게 베란다의 식물들은 시간이라기 보단 “나를 감싸주는 풍경”이다. 대화를 위한 사전 질문에 주온은 이 풍경이 “서서히 스며들어 내게 영향을 미치는 공간으로 있어주면 좋겠다”라고 적어 보냈다. 한편 나는 최근 들어 그냥 함께 있는 것만 한 관계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다른 한정사나 동사를 가져오지 않고 함께 있는 것. 가족으로, 친구로, 동료로, 나무나 이끼나 민들레 홀씨로 그냥 존재하는 것. 계약도 사랑도 우정도 뿌리도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함께 있는 건 최고의 관계다. 초록집에는 신아 양온 여경 주온과 도레 그리고 무수한 식물들이 있다. 나는 지난 주말에 들러 작고 잦은 경이와 평안의 의미 약간을 얻어왔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시 구절도. 오늘 얘기에 꼭 들어맞는 내용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여경 씨가 책장에서 꺼내왔다. 나도 이 단어들이 함께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여기 옮긴다.


무너져 내리는 숲의 한 귀퉁이를 가꾸느라
나는 사계절을 다 쓴다 (신영배, 시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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