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루가 지나면, 문득 돌아보게 된다. 앞만 보고 내달려온 시간들,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허공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흔적일 뿐일까. 사람들은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발끝을 채근하고, 속도를 높이고, 끝내 숨이 차오르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을 몰아붙인다. 어느 순간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한 듯, 내 발걸음이 더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속도 속에서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지만, 눈을 돌리지 못하고 그저 앞만 보며 달렸다.
하지만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 그토록 앞서려고만 했을까. 한 걸음 늦게 간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 텐데. 조금 더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춰 걸을 수 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것들 사이에서 조각처럼 놓쳐버린 작은 순간들, 잊혀져간 감정들이 어쩌면 그 자리에 남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느리게 걸어보았다.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다들 앞서 나가는데, 나만 이 자리에 남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이내 조용히 가라앉았다. 한 걸음 늦게 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지나는 바람에 실린 무거운 향기, 서서히 물드는 하늘의 색깔 같은 것들, 고작 보이지도 않는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도 벅찬 편안함을 느끼는 내 모습까지. 그동안 그렇게 놓쳐왔던 것들이 선명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속도를 늦추니 비로소 나의 감각들이 깨어났다. 바람의 결이 느껴지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전해주는 땅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그저 흘려보냈을 소소한 것들, 빠른 속도에선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순간들이 내 곁을 맴돌았다. 조금 늦더라도,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나의 감정과 기억들이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어느새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 누구와 가든, 결국 내 발걸음은 나만의 것이고, 그 속도 또한 내가 결정할 일이다. 조금 더 천천히, 한 걸음 늦게 걸어갈 때 만나는 세상은 내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그 자리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늘 빠르게 흐른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내달린다. 저마다의 목표와 타이밍에 맞춰 속도를 더한다. 그들이 내 옆을 스쳐갈 때마다, 나도 그 속도에 맞춰야만 할 것 같은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들의 보폭에 나를 끼워 맞추며 앞서 나아가려고 할수록, 걸음이 낯설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내 발끝이 닿는 이 땅이 움푹움푹 꺼진 것처럼 평탄하지 않은 듯 싶었다. 내 안에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빠른 걸음과 조급한 숨소리로 채워졌다.
이 책은 그 막막함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이 정해둔 속도를 따르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법을 찾고 싶었다. 소리 없는 약속처럼 우리에게 강요된 빠름이 아닌,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늦춰보기로 했다. 내 속도에 맞춰 한 걸음 느리게 걸어보고 싶었다. 내 안의 소리들이 들려오는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 느리게, 나만의 시간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도 누군가는 빠르게, 또 누군가는 천천히, 각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선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보다 조금 더 느리거나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걸음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들이 가진 속도로 그들만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면, 그 안에 담긴 하루와 그들의 시간이 문득 느껴지곤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옷자락 속에서도, 길에 남은 발자국 속에서도 각자의 삶이 숨 쉬는 것 같다.
이 책을 적으며 나는 그들을 떠올렸다. 내가 느린 걸음으로 지나온 풍경들이 이 글에 담겨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조용한 위로가 전해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통해 잠시 자신을 돌아보고, 각자의 속도로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이 소리 없는 동행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 여정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천천히 걷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생기발랄하게 흔들리는 꽃들, 스치듯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의 향기, 오늘도 구름으로 그림을 그린 하늘같은 것들. 이 모든 것은 내 속도로 걸어갈 때만 마주할 수 있는 풍경들이다. 너무 빨리 지나가면 놓쳐버릴 것들, 나만의 걸음을 맞춰야만 보이는 것들. 모든 것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듯 보일 때 비로소 발견되는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은 말이 없고, 소리 없이 가까워진다.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발걸음이 줄 수 있는 안정감과 그 고요한 따뜻함이 온전히 전해진다.
바란다. 이 책이 자신만의 속도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쉼표가 될 수 있기를. 끝없이 달려가는 삶 속에서 잠시 멈춰, 그동안 잊고 지내온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나의 선율이 오늘도 한 걸음 늦게 걷는 너의 쉼표가 되어, 이 밤을 지새우는 너의 위로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