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흔한 단어 15화

채변봉투

by Carroty


어느 날,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똥을 훔쳐본 적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나를 께름칙한 눈으로 보면서 뒷걸음질을 칠지도 모른다. 왜냐면 아무도 똥을 훔치지 않으니까. 어릴 적 학교 숙제로 ‘채변봉투’를 제출해야 할 때도 아무나의 똥을 가져다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똥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했을 테니까.



‘똥’은 소화의 결과물이다. 말하자면, 몸이 소화를 한 뒤 남긴 산물이다. 이제 이 똥을 창작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려고 한다. 우리는 한 때, ‘창작의 산물’을 훔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던 시대를 살았다. 그게 잘못이라는 걸 자각한 건, 꽤 최근의 일이다. 2000년대 초반, ‘소리바다’라는 P2P프로그램에서 우리는 MP3 파일을 손쉽게 다운로드하고 업로드했는데, 이건 저작권법상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저작권’에 대해 무지한 시대가 있었다. 아직도 ‘저작권’은 일반인들에게 어렵다. 책을 출간하고, 글을 쓰고 있는 내게도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창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고심 끝에 만든 산물을 함부로 쓰는 일에 대해 한 번쯤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 ‘창작활동’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나는 현재의 직업을 갖기 전에 과학 강사로 약 2년간 일했었다. 6세 반부터 있어서 과학 전체를 다뤘지만, 고등과정에 있어서 주력은 생물이었다. 오랜만에 특기를 한 번 살려보고자 한다.



창작자는 입으로 다양한 재료를 씹어 삼킨다. 그것은 주변인의 말일 수도 있고, 꿈에서 본 세상일 수도 있다. 어느 날 조카가 알려준 새로운 -인형을 정리해 주는 강아지 신과 같은-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 모든 재료는 식도를 통해서 위로 이동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각종 시각, 청각 정보들이 내 안에서 활자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위에서는 소화액을 분비하여 입에서 삼킨 재료를 버무리기 시작한다. 위는 스트레스에 너무 약해서 이 과정에서 창작자는 토할 수도 있고, 위염에 걸릴 수도 있다. 소화액이 분비가 잘 되지 않아서 재료들이 생각보다 오랜 시간 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창작자는 위에서 살균작용을 통해서 타인의 아이디어와 비슷한 부분을 배제하고, ‘나만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위에서 일부 소화가 이루어지면 소장으로 보내져서 전체적인 소화가 이루어진다. 감정이 언어로 번역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조차 소화시킬 수 없었던 부분까지 소화시키고, 세상의 나가기 직전의 모습을 갖춘다. 그렇게 되면 대장으로 넘겨져서 수분을 빼고, 가스를 배출시키면서 퇴고를 통해 최종 산물의 형태를 점점 갖춘다.


그렇게 항문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온다. 창작자는 이 순간에 치질이 생길 수도, 카타르시스가 밀려올 수도 있다. 배변을 하기 전까지는 어떤 감정을 느낄지 알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렇게 창작자는 자신만의 똥을 싼다.



이런 인고의 시간을 겪은 산물을 누가 훔친다면 ‘창작자’인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만약 내가 피 흘리며 싼 똥을 누군가 훔쳐가서 자신의 이름표를 붙인다면 단순한 ‘화’를 넘어서 ‘경멸’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울면서 외칠지도 모른다. “내가 싼 피똥이라고!”


창작자는 권리를 잃으면, 더 이상 계속해서 창작할 힘을 잃게 된다. 아무리 힘든 과정을 참아내고 ‘결과물’을 내놓아도 이게 무슨 소용이지,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 창작 자체를 놓아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콘텐츠를 접할 수 없다. 저작권은 단순히 ‘훔치지 말라’는 사인이 아닌 ‘계속 만들 수 있게 해 줘’라는 그들을 응원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저작권은 그들의 ‘노동활동에 대한 보장’에 대한 하나의 방식이다. 창작자에게 저작권을 지키지 않는 것은 직장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은 ‘야근 수당’도 없고, ‘포괄임금제’도 아니다. 단순히 결과물에 대해 매겨진 값어치가 끝이다. 그걸 보장하는 것이 ‘저작권’이다. 그런데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직장인에게 애사심만으로 토요일에 나와서 일하라는 것과 같다. 가능한가? 나는 불가하다. 애사심은 돈과 복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저작권’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창작자에게 예의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자, 다채로운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무형의 약속이라 생각한다.



‘저작권? 그깟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니 똥, 칼라똥”

keyword
이전 14화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