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헤어진 남자친구가 '진짜로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뭐냐'며 연락해 온 적이 있었다. 헤어질 때와 똑같이 말해줬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내게 다른 남자가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퇴사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사람들과 건강 때문이라고 말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사람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내게 조심스럽게 '어디 가냐'며 건네던 질문들. 어쩌면 건강 때문이 아니라 좋은 데 가버리는 거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출근일까지도 여느 때처럼 업무를 하고, 퇴근 후에 회식을 했다. 다만 그 회식이 나의 송별회였을 뿐이었다. 보통 때였으면 1차까지만 먹고, 조용히 집에 들어갔을 텐데 '주인공'이 빠지면 되겠냐는 말에 2차도 함께 했다. 약이고 뭐고 같이 한잔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소란 속에서 밀려드는 진심을 맑은 정신으로 듣고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자정이 넘어서 끝난 회식에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한 사람, 한 사람 조용히 진심 어린 말을 복기하고, 내게 전해준 카드와 편지를 읽어봤다. 오래된 연애를 하다가 이별한 기분 같았다. 막상 실감은 나지 않지만 먹먹한 감정이 언뜻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엉엉 울어버리는 거, 아니야? 하는 상상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눈물이 날 뻔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참았지만, 터진 눈물샘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휴지로 눈을 꾹꾹 누르면서 내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는데, 그중에 한마디가 나를 흔들었다.
"매니저님, 저 매니저님 브런치 글 다 읽었어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
언젠가였더라, 한 꼭지 보여주고 싶어서 전달했던 브런치 주소였는데 싶었다. 그리고 최근에 내가 쓴 글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가면서 작은 탄식을 속으로 흘려보냈다. 그녀는 내가 왜 퇴사하는지 진심으로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하며 눈물이 날뻔했다. 울지 않기 위해 눈물을 삼키고, 애써 웃으며 검지 손가락으로 볼 위에 세로로 쓸어내렸다. 내 글을 읽어줬다는 것에 감동받았고, 고마웠다. 그리고 내 진심을 알아서 날 더 이상 붙드는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그 말에 미안했다.
내가 마음으로 참 좋아하는 친구였다. 같이 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고,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터라 함께 나눌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안타까웠다. 가끔은, 내가 술을 마셨다면 그녀와 더 친해졌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인연을 억지로 붙들려고 무언가 한들, 이어질 인연은 어떻게든 이어지고 헤어질 인연은 어떻게든 헤어질 테니 더 애쓰진 않았다. 다만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내 마음은 전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뒤늦게 친해진 것 같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친구도 있었다. 간장을 하수구에 버리면 바다가 짜져서,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먹고 있다는 친구였다. 내가 장담하건대 이건 술이 취하기 전부터 하던 말이니 진심일 거다. 갖가지 방법을 제시했지만, 그 친구의 마음을 바꿀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건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숙제로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과 헤어지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일부는 헤어지지도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회사 밖으로 인연을 끌고 나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퇴사하고 계획한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기로 한걸. 이별한 남자친구와는 친구조차 될 수 없지만, 회사와의 이별은 별개가 아닐까. 회사와는 이별했지만, 회사 밖에서 내 마음을 울린 이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보려고 용기 내어 물어보고자 한다.
"회사 동료로서 이별했지만, 내 친구가 되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