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흔한 단어 17화

불안

by Carroty

퇴사 후 첫 외출이었다. 정신과 진료를 위해 외출한 김에 남편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기로 해서 저녁을 먹고, 카페에 앉아있던 차였다. 남편이 내게 '퇴사해서 가장 좋은 점이 뭐야?'라고 물었다. 남편은 가끔 정신과 의사사와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두 눈을 꿈뻑이다가 정신과 진료받았을 때 의사한테 답변한 세 가지를 똑같이 읊었다.


"일단은 잠을 푹 잘 수 있고, 둘째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고, 셋째는 글을 쓰고 싶을 때 글을 쓸 수 있다는 거야. 알람에서 해방된 게 가장 좋더라. 나는 틀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틀에 갇히는 건 싫어하는 것 같아. "


두 번째 말하니까 조금 더 정돈된 말로 대답할 수 있었다. 이래서 모의면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편은 내 대답을 듣더니 '자유가 생겨서 좋은 거구나'라고 요약해 버렸다.




자유와 관련해서 학창 시절에 줄곧 듣던 말이 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우리의 말에 어른들은 '책임'을 늘 강조했다. 나는 불현듯 남편의 말에서 '책임'을 느꼈다. 나는 한 번도 어른인 적이 없었고, 자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일을 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자의에 의해서 오랜 시간 '백수'로 지낼 결심을 했다. 이를 아직 만끽하지도 못했는데 이따금 찾아온 '불안'이 나를 찾아왔다.


"안녕? 잘 지냈어? 나는 불안이야."


불안은 내 감정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몰랐다. 퇴사 후 며칠 동안 잠만 잔 것은, 의사 선생님한테 '어떻게든 되겠죠'라고 말한 것은, 사실은 내 안의 불안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괜찮은 척'을 해봤던 것이 아닐까. 어쩐지, 선생님은 약을 줄이자는 소리를 하지 않더라. 전문가는 다르다.


조심스레 나의 안으로 '불안'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를 탁자에 앉히고 차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서에서부터 불안을 느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지 생각했다. 그러다 '퇴사 후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 자신이 문제인가?' 하는 질문이 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잠시 멍해졌던 나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좀 쉬기로 했잖아!'라고 억울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불안을 중심에 두고 나 스스로와 싸움을 몇 차례 이어나갔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불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조심스레 마주한 불안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 걱정하고 있었다. 내겐 계획이 많았는데, 그 계획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흩어져버릴까 봐. 표면적으로 건강을 회복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이면에 내가 갖고 있는 자아실현이라는 크고 거창한 계획이 잊힌 걸까 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불안아, 나는 한 달은 천천히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보려고 해. 잠도 푹 자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내 삶을 다시 쌓아 올릴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어. 퇴사 전부터 준비한 그 소설들을 잊진 않았어. 아주 잠시 옆으로 미뤄둔 것뿐이야. 다만 너무 급하게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 속도로 가는 법을 찾는 중이야. 그래서 조바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


천천히 내 계획을 불안에게 공유했다. 또다시 번아웃에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로 소진되어 버리는 것보다 오랫동안 따뜻하게 타는 불이 되고 싶었다. 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겠다며, 내 감정의 집에서 천천히 떠나갔다. 나는 깨달았다. 저 불안은 나를 또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내가 정확한 방향을 갖고 있다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온다한 들 겁먹을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더욱 나는 나 스스로와 마주할 힘을 가져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회사에서 내게 지어준 것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었다.

keyword
이전 16화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