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무실에서 동료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었다.
“헤이 XX, 지금 네가 사무실에서 가장 직급이 높고 근속이 긴 거 알아?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 네가 최종 책임자야.”
그러고 보니 내 윗사람들이 모두 출장이다 휴가다 해서 없어서 나도 여유로운 한 주를 (요새는 무두절이라고 한국에선 하던데…)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직급이야 나도 별거 아닌 사람이라 농담으로 한 거지만 내가 나이도 제일 많은 편이고 또 근속 연수도 가장 긴 축에 속하는 그곳에서 고인물이었음을 발견했다.
한동안 구직 활동을 열심히 했고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떠나지 않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지금 회사에서 고인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자릿수를 넘어가는 연수를 근무하다 보니 한국인이 나밖에 없는 회사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곤 하는데 내가 담당하는 업무에 있어서는 내가 거의 살아있는 위키백과 수준이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관계도 원만하다 보니 대인관계에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없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동양인/한국인이라서 받는 인종차별이나 불이익,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오래 봐온 사이이기도 하고 내가 여기서 더 오래 일했기 때문이다.
그저 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적다는 게 아니다. 그저 다른 회사에 가서 이러한 위치를 다시 쌓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 일인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눈물이 필요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미국에 온 첫해 우스꽝스러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와서 서로 교환하고 열어보면서 서로 웃고 즐기는 그런 이벤트가 있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눈치 없는 동양인 남자가 나름 센스 있다고 생각한 선물을 들고 파티장에 나타났을 때 모두가 어색하게 나를 쳐다보던 그 시간이 멈춘듯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회사에서도 나를 대놓고 무시하던 사람들, 도와주는 척하면 은근히 무시하던 사람들, 인종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떠났고 나는 남아서 고인물이 되었다. 최소한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 회사에서는 없다. 자기가 업무상 아쉬워서라도 말이다.
좀 더 젊었을 때는 그런 모든 일들을 뚫고 나갈 에너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에너지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아서라도 얻어야 할 정도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몇 주 전 뜬금없이 리쿠르터한테 연락이 왔다. 꾸준히 이메일은 받지만 이직을 안 하기로 결정한 이후 대부분 그냥 무시하는데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라 답장을 했다. 리쿠르터랑 꽤 긴 전화통화를 했고 오늘 hiring manager와 1시간 조금 넘게 인터뷰를 했다. 거기서 위에 쓴 것 같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민자로서 이직을 할 때 고려해야 할게 더 많다. 회사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연히 자기네 회사가 위치한 지역과 회사가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해 멋지게 포장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이제 당당하게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미국화가 된 것 같다.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회사도 어느 정도 나에게 맞춰야 한다. 당연히 그것은 연봉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문화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부분을 특정하진 않았지만 최소 다른 문화권에서 온 누군가를 이해할 준비는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세상이 어느 때인데 이런 생각을 하냐고 하실 수도 있는데 나는 동양인들이 차고 넘치는 IT나 의료, 연구, 학술 분야에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호기심차 인터뷰를 본 것이고 만일 온사이트 인터뷰 요청이 온다면 타주를 가야 하기 때문에 어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후기를 남겨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