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완벽주의자(2)_의사 선생님과의 토론
전편 : 결국 출근하지 못했다.
한번 터진 눈물은 다시 마를 기미 자체가 보이지 않았고, 정신과 상담지를 작성하는 동안도, 진료실로 들어가는 동안도 내내 나는 연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내담실에 들어가자마자 목구멍에 석탄을 토하는 사람마냥 나의 상황, 기분,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쳐해야 하는지, 이미 비슷한 경험이 한차례 있는데 앞으로도 이래야 하는 것인지를 쏟아내었다. 선생님은 내 말을 다 들으시고는 으레 모든 정신과 선생님이 그러하시듯이 기계적인(내가 느끼기에) 공감을 해주셨다. "힘드셨겠네요. 신경이 쓰이시겠네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모든 것에 화와 슬픔을 잔뜩 품고 있던 나의 솔직한 속마음으로는 "흥, 그 교과서적인 공감을 빨리 집어치우고, 나를 설명해달란 말이에요!" 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선생님은 목소리를 가다듬으시더니 내가 가지고 온 설문지는 보시지도 않은 채, 나의 병명을 말해주셨다.
우린 이런 사람은 정서적 완벽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정서적 완벽주의자?
일하면서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지만, 정서적인 면도 완벽주의자가 존재하나? 아니 그리고, 완벽주의가 뭐가 어때서! 항상 날로 먹고 노력 안하는 금붕어 같은 사람들보다 앞으로 발전하려고 하고, 완벽까진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게 훨씬 낫지! 이 의사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 안의 분노와 억울함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서적 완벽주의자는요 불쾌한 감정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제거하려는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불쾌한 감정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가만히 느끼고만 있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게 변태 아니야? 고통을 좋아하는 거라면 그거야 말로 정신병원 행이라구!
선생님 : 이런 경우, 내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는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해 본인의 모든 에너지를 쏟게 되고, 설사 코끼리를 제거하게 되더라도, 불편한 감정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때문에 그 다음에 방 안에 개미에게도 코끼리처럼 반응하거나, 역설적이게도 본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다니게 됩니다.
특히, 이들은 머리로는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 안의 코끼리를 제거하기 위해 상황을 바꾸는 것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불쾌한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없듯이, 방 안의 코끼리는 절대 제거할 수 없습니다.
띠잉...방 안의 코끼리(= 나의 불안과 긴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니... 이 무슨 원효대사 해골물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선생님과의 토론(싸움)을 이어나갔다.
나의 속마음 : 선생님 백번 양보해서 제 코끼리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할게요. 그런데 동기들이 저 빼고 재밌는 얘기를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풉 거리면서 재미를 느끼는 그 순간만큼은 제 코끼리가 제일 큰거 아닌가요?
선생님은 내 저 말에 몇 번 웃으시더니, 답하셨다.
선생님 : 환자분의 방금 그러한 기제를 우리는 투사라고 합니다. 흔히 남탓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보니, 내가 느끼는 이 불안과 긴장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오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갈등의 근원을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환자분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기존에도 그러신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상황을 바꿔서 해당 코끼리를 없애더라도, 환자분께서는 앞으로 아무것도 없는 흰방을 위해서 집착하실 거에요. 지극히 일반적인 방어기제 중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코끼리가 있다.
나의 방에만 코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른 채, 이제까지 나를 괴롭혀 왔다.
> 다음편 : 감정의 세탁기를 돌려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