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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어머니의 음식 ②신김치와 김치찌개

by 박인권

어머니의 음식 ②신김치와 김치찌개


#김장의 추억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들 밥상에 찌개는 빼놓을 수 없는 단골 메뉴다. 가정에서는 물론 집 밖에서도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다는 김치찌개를 비롯해 된장찌개, 청국장찌개, 순두부찌개에다 꽁치찌개까지 지금도 익숙한 찌개류는 내가 어렸을 때도 익숙한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김치찌개는 신김치로 끓여야 제맛이라는 당신만의 김치찌개 금과옥조(金科玉條)를 불문율처럼 존중했다.


공장 김치가 없던 시절,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 끝 무렵은 김장의 계절이었다. 우리 집도 해마다 11월 초 무렵이면 마당에 빨간 고무다라이 여러 개를 펼쳐 놓고 김장 준비에 바빴다. 네 식구가 이듬해까지 먹을 김장을 어머니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 대구에 사는 두 고모가 늘 거들었다.


동네 재래시장에서 대량으로 사들인 배추는 먼저 굵은 소금에 하루 동안 절여 숨을 죽이고 물기를 빼야 했다. 배추 숨을 죽이는 일은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한 번씩 배추를 뒤집어 겉에서부터 속까지 숨을 골고루 가라앉혀야 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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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배추. ⓒBayartai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김장 채비가 끝나면 한쪽 고무다라이에서 김장 소로 쓰일 양념 제조에 들어간다. 양념 재료로는 고춧가루, 다진 마늘과 생강, 새우젓, 멸치 액젓, 설탕, 소금, 양파와 배즙, 찹쌀을 끓여 만든 찹쌀 풀 등인데, 김장 양념은 김치의 발효와 숙성, 보관 상태와 유효기간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라 배추 숨죽이기와 함께 어머니가 가장 신경 쓴 대목이었다.


김치 맛은 배춧속 맛이 좌우한다고, 어머니는 붉게 버무린 양념과 함께 토막 낸 갈치와 굴, 잣을 배춧잎 사이사이에 채워 넣었다. 맛이 제대로 오른 김장 김치를 항아리에서 처음 꺼내 먹을 때, 부드럽게 곰삭은 갈치와 굴은 김치의 풍미(風味)를 한껏 끌어올려 식구들 입맛을 풍요롭게 했다.


#밥도둑, 김장 겉절이

김장 때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가 있다. 김장 중간중간 또는 김장 끝 무렵, 즉석에서 양념을 쓱쓱 묻힌 배춧잎을 손으로 길게 찢어 먹는 겉절이의 맛은 비교 불가였다. 갓 밴 소금기로 짭조름하게 아삭거리는 배추의 식감과 매콤하게 톡 쏘는 양념의 자극적인 맛이 조화를 부려 밥 생각을 절로 나게 하는 밥도둑이었다.

김장 김치는 4인 가족 기준 배추 20포기가 일반적이나, 우리 집은 식구들 모두 유달리 김치를 좋아해 김치 소비량이 많은 데다 김치찌개를 워낙 즐겨 먹어 25포기~30포기 정도 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 김장 풍경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신혼 초, 김장철이면 어머니는 꼭 서울로 올라와 손수 김장 김치 담그는 일을 진두지휘하며 당신이 젊었을 때 경험을 들려주곤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일하는 틈틈이 툭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를 옆에서 귀동냥으로 들을 때마다 아련한 옛 추억이 내 눈앞으로 소환돼 혼자서 슬며시 미소를 짓곤 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장모도 우리 집 김장을 도왔는데, 2013년 이후부터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김치를 사서 먹고 있다. 공장형 마트 김치가 대중화된 지 오래고, 김치 제조 기술이 날로 발달해 주문해서 먹는 김치의 맛도 기대 이상이다.


신김치.  20230725_121704.jpg

어머니는 김장한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은 신김치로만 김치찌개를 끓였다. ⓒPARK IN KWON


#어머니표 김치찌개와 신김치

김장 김치가 맛이 오를 대로 오를 때쯤이면, 어머니는 밥상에 김치찌개를 올렸다. 우리 집 김치찌개에 들어가는 식재료도 여느 집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는 나도 심부름을 여러 번 갔었던 동네 단골 정육점에서 하루 이틀 전 도축한 한돈 목살과 반찬가게에서 금방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 한 모를 사 집에 오는 즉시 김치찌개를 끓였다.


김치찌개 맛을 결정짓는 식재료의 우선순위에서 어머니는 늘 김치를 맨 앞자리에 놓았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 어머니는 김장 김치가 아직 6개월이 지나지 않은 신김치로 김치찌개를 요리했다. 그늘진 장독대의 서늘한 곳에서 유산균(乳酸菌)이 폭발적으로 불어나 신맛을 내는 신김치는 어머니에게 김치찌개용 맞춤형 김치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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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지 2년이 넘은 묵은지. 상온 숙성인 신김치와 달리 저온에서 오래 곰삭혀 시큼하고 짠맛이 특징이다. ⓒPARK IN KWON


6개월 이상 저온 숙성이 필요한 묵은김치가 시큼시큼하고 짠맛이 강한 김치찌개라면, 상온 숙성한 신김치는 신맛과 단맛, 짠맛과 매운맛 네 가지 맛이 균형을 이뤄 칼칼하고 시원한 우리 집 김치찌개의 전형(典型)이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김치찌개에 고춧가루만 넣고, 고추장은 따로 가미하지 않았다. 고추장은 매콤한 풍미에 도움이 되는 대신 혀끝에서 올라오는 텁텁함이 강해 시원하고 개운한 신김치의 장점을 희석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인공 조미료를 따로 사용하지 않고 물의 양과 다시마, 소금 간으로 맛을 낸 어머니표 김치찌개를 나도 한 번씩 흉내 내지만, 어릴 때 그 맛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만만한 듯, 만만치 않은 김치찌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자주 찾는 김치찌개는 재료를 다듬고 손질하고 끓이는 조리법이 복잡할 것 하나 없지만, 김치찌개만큼 제맛을 내기 힘든 음식도 없다. 국민 찌개, 김치찌개는 친숙한 만큼 맛에 대한 기대와 평가가 제각각이고, 김치의 맛도 천차만별이라 만만한 듯, 만만치 않은 천성이 까다로운 음식이다.


흔히 묵은지가 김치찌개와 찰떡궁합이라지만, 우리 집은 묵은지로 김치찌개를 끓이지 않았다. 묵은김치는 6개월 이상 저온 숙성된 김치라 발효가 깊고 강해 신맛이 지나치고 짜 식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아버지부터 시고 짠맛보다는 입안이 깔끔해지고 속도 풀리는 신김치 김치찌개의 알싸한 맛을 좋아했다.


경상도 음식은 일반적으로 양념이 세고 짠 편이지만, 우리 식구들은 짠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묵은김치 찌개와 마찬가지로 묵은김치 찜도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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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 ⓒfoolishmoon2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물에 빤 김치

어머니가 묵은김치를 처리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묵은김치를 찬물에 몇 번이고 헹궈 고춧가루를 말끔히 털어내고 소금기를 빼내 신맛과 짠맛을 순화시켜 먹었다. 물에 빤 김치라고, 겉모양은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담은 백김치 같은데 하얀빛이 감도는 백김치보다 색깔이 노르스름하고 매운맛도 살아 있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어릴 때와 달리, 성인이 되고 나서는 가끔 묵은김치를 먹는다.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 묵은김치가 어우러진 남도의 별미 홍어삼합을 먹을 때다.


이번 주말에 어머니표 김치찌개에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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