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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n 26. 2021

빈센트 반 고흐의 환생(還生) 여행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⑭무아지경과 혼연일체

과거를 떠나(미래로 나아간(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무아지경과 혼연일체


#붓놀림의 방향과 붓놀림의 기교

 진작부터 나는 밀의 이런 헌신적인 자세를 눈여겨보면서 그림으로나마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다짐했고, 미약하지만 이 그림으로 마음의 빚을 대신하기로 했다. 내가 밀에 진 빚에 보답하는 방식은 황금색을 듬뿍 머금은 붓놀림의 처절함이었다. 처절함은 붓놀림의 방향과 붓놀림의 기교, 두 가지로 발현됐다. 


 붓을 들기 전 이미 나와 혼연일체가 된 붓놀림의 방향은 공중으로 솟구치거나, 바람결에 쓰러질 듯 휘날리거나, 갑자기 고개를 숙이듯, 아래로 심하게 꺾어지는 식으로 요동쳤다. 붓놀림의 방향은 세 가지 동작으로 무한 반복됐다. 캔버스에 여백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거듭 되풀이된 붓놀림의 군무(群舞)는 때로는 독립적으로, 때로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어졌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채운, 눈앞에 보이는 밀 줄기와 밀밭의 모습은 밀을 향한 나의 간절한 사랑이 붓질로 나타난 결과다. 검푸른 하늘에서 눈치챘겠지만, 임박한 폭풍우를 예고하는 날씨도 내가 이미 의도한 붓질의 방향성을 한껏 부추겼다. 


빈센트 반 고흐까마귀가 나는 밀밭캔버스에 유화, 50.5 x 103.0cm,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또 하나, 상처받은 내 영혼을 조건 없이 치유해준 밀밭의 은혜를 갚고자 한 나의 염원이 깃든 붓질의 기교는 밀밭의 형상을 드러내는 양대 전술, 즉 ‘채찍질 기법’과 ‘난을 치는’ 기법으로 구체화됐다. 생레미 시절 터득한 굵고 짧게, 굵고 길게 빠른 속도로 휘갈기듯 칠해 나가거나(채찍질 기법), 순간적으로 끊어 내리치듯 찍는 타법(난을 치는 기법)을 가하자 밀밭은 밀들이 흐느끼는 소리로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현생의 종말과 내생의 도래

 검푸른 어둠이 뒤덮고 있는 하늘은 폭풍 전야처럼 말이 없으나 불길한 기운을 숨기지 않는다. 낮게 깔린 하늘 뒤에 숨은 거센 비바람이 금세라도 밀밭을 사정없이 덮칠 기세다. 불안한 징조는 하늘 오른쪽 위에서부터 밀밭을 향해 저공비행을 하며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단의 까마귀 떼를 목격하는 순간, 긴박한 공포로 돌변한다. 


 내생(하늘)이 현생(밀밭)을 접수할 시간이 임박했다는 신호다. 시커먼 하늘 아래 외로이 떠 있는 두 조각의 흰 구름이 정지된 듯, 흘러가고 있다. 저물어가고 있는 현생이 힘겹게 숨을 껄떡이는 소리를 나는 구름의 모습에서 듣고자 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붓질은 밀밭보다 더욱 숨 가쁘고 가파르게 진행됐다. 현생의 종말과 내생의 도래를 실감 나게 돋우기 위해서였다.            


#세 갈래 황톳길

 나는 이 그림에서 세 갈래 길로 전생을 표현했다. 왜 하필 길이 세 갈래인가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고 들었다. 그중 목회자의 꿈이 무산된 아쉬움과 평생 동생에게 신세만 진 미안함, 화가로서 성공한 삶을 이루지 못한 회한을 그림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제일 그럴듯해 다수설처럼 통용된다는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꿈보다 해몽이 유효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림의 세계에서 판단은 감상자의 몫이니 여기서 굳이 내가 유권해석을 내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감상자가 그렇다면 그런 법. 다만 밝혀둘 점은 땅은 전생의 상징이라고 이미 말한 대로 세 갈래 길 모두 출발지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생에서 현생이 왔지만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현생의 미래인 내생의 실체를 우리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태어나기 이전의 삶을 살아보거나, 죽고 난 다음의 삶을 경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 길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가 없다. 각자 나름의 상상력으로 보이지 않는 길의 뿌리를 짐작해보기를 바란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난 길은 길의 진행 방향만 살짝 드러났을 뿐, 어디로 이어져 어떻게 끝날지 모르게 감춰져 있다. 사실은 감춰져 있는 게 아니라 전생의 또 다른 이름인 길의 운명이기에 당연한 모습이다. 모름지기 길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기에 내가 의도적으로 두 길을 숨겼다는 주장은 사실과도 다르고, 이치상으로도 안 맞다. 


빈센트 반 고흐삼나무가 있는 밀밭캔버스에 유화, 73 x 93.4cm, 1889,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전생과 현생내생은 일맥상통

 그렇다면 가운데 길은 어떻게 된 걸까. 녹색 풀로 둘러싸여 밀밭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쭉 뻗어나간 길은 밀밭의 끝자락 앞에서 끊겼다. 밀밭 가운데를 큼지막하게 뚫고 나간 길이라니, 생뚱맞다. 농부들이 풍성한 밀밭의 수확량을 떨어뜨릴 심산으로 중앙에 길을 냈을 리는 만무하다. 그것은 내가 현생인 밀밭 사이를 헤치고 나가 내생인 하늘로 올라가겠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밀밭이 끝나가는 지점을 앞두고 길 문이 닫힌 것은 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암시다. 


 사람들은 내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 그림으로 토해냈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블랙홀처럼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심연을 연상케 하는 검푸른 하늘과 죽음의 메타포인 까마귀 떼, 끊어진 길과 어디서 나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길 없는 길이 그 증거라고 제시한다. 또 내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까마귀가 나는 밀밭’ 그림에 슬픔과 고독을 새겼다고 고백한 내용을 근거로 죽음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 짓는다. 모두 내 마음의 일부만 맞춘 의견들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 그림에서 전생과 현생, 내생을 모두 드러냈다. 정신질환과 광기가 성장시킨 극한의 불안감과 공포심을 심는 것에서 나아가 전생의 업보를 털고, 현생에서 바랐지만 이루지 못한 소원을 내생에서 꽃피우고자 하는 뜨거운 의지를 표출시킨 것이다. 결국 전생과 현생, 내생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하늘과 밀밭, 땅, 풀 모두 내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격정적이고 연속적인 붓놀림이 만들어낸 물감의 군무(群舞)인데, 그때 나는 헛것이 보이는 환청(幻聽)과 소리가 색으로 보이는 색청(色聽)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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