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⑮세상에 이럴 수가
과거를 떠나(革) 미래로 나아간(新)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⑮세상에 이럴 수가
#믿기지 않는 내 그림값
환생 여행을 떠나면서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내 그림의 존재감 말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나는 살아있을 때, 사람들이 내 그림을 왜 그렇게 홀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을 숱하게 그렸건만 세상은 그것을 그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기야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과 감정을 그렸으니, 광인(狂人)의 광기(狂氣)라고 여겼을 법도 하다. 나는 죽기 전까지 늘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무덤 속에서도 그 생각만 하면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그런데 억울함과 분함은 방금 깜짝 놀라움으로 돌변했다. 그림값이 무려 몇백억 원을 호가한다는 말에 나는 까무러칠 뻔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기 무섭게 천문학적인 가격에 낙찰된다며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니, 세상에 이럴 수도 있나 싶었다. 생전에 내 그림은 딱 한 점 팔린 게 전부였다. 그림 인생 10년은 정말이지 가혹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다. 그랬던 내 그림이 지금은 부르는 게 값이라니, 내가 어찌 실감을 할 수 있겠나.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캔버스에 유화, 67 x 56cm, 1890, 개인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990년 크리스티 경매 당시 최고가(8,250만 달러)를 기록했다는 그림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림을 그린 세월에 비해 꽤 많은 작품을 남겼다. 거의 나흘에 한 점씩 그린 셈이니, 다작(多作)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그림값이 얼마인지 너무 궁금했다. 내가 죽고 100년이 지난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 ‘가셰 박사의 초상’이 나왔는데 낙찰가가 자그마치 8,250만 달러를 기록했단다. 당시 경매 사상 최고가 신기록이었다는데, 일본인 사업가가 낙찰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우키요에를 좋아해서인지 일본인들이 유달리 내 그림을 선호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로서는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내 그림에 투자할 줄은 몰랐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내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그린 그림인데, 두 가지 판이 있다. 나머지 하나는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지만 살아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환생 여행을 마치고 무덤으로 돌아가면 테오에게도 이 사실을 꼭 전해야겠다.
#제수(弟嫂)씨, 고맙소
화가로서 내 이름은 사후에 알려졌다. 죽고 난 뒤 내가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제수씨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환생 여행 틈틈이 읽어보라고 남자 수행원이 건네준 책을 통해 알았다. 수행원은 성격이 싹싹하고 말본새가 너무 예뻐 내가 여자라면 먼저 프러포즈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와 내 그림에 관한 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겸연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했다. 살아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한 제수씨에게 늘 마음의 빚이 있어 미안하고 민망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감사의 뜻을 전해야겠다.
내가 죽고 6개월 후 동생 테오마저 저세상으로 떠나 졸지에 미망인 신세가 된 제수씨에게는 건사해야 할 아들 하나가 있었다. 돌이 될까 말까 한 갓난아기를 남편 없이 홀로 키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젖도 못 뗀 어린 자식과 둘이서 살아갈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제수씨는 남편인 테오의 빈자리가 태산처럼 크게 남아 있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이름과 내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도록 남은 인생 전부를 걸었다. 제수씨 나이 불과 스물아홉 때였다.
제수씨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이다. 영어 교사로 재직 중 내 동생과 연애 결혼을 했다. 내가 화가였고 테오가 화상이었던 영향도 있었겠지만, 제수씨는 그림을 보는 안목과 브랜드 마케팅 능력이 남달랐다. 제수씨는 내가 남긴 유작과 테오와 주고받은 서신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900점 가까운 그림에다 700통이 넘는 편지를 간수하기도 힘든데 아예 통째로 짐을 싸 자신의 고향 암스테르담으로 귀향을 했다. 그곳에서 하숙을 치며 생계를 꾸려간 제수씨는 내 그림을 알리기 위해 지역 예술가와 평론가들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심미안과 예술에 대한 열정, 시아주버니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한나 반 고흐 봉허. Photo by Woodbury & Page, 1889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총명한 눈빛과 야무진 생김새 만큼이나 헌신적인 삶을 산,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은인이다.
1905년, 나의 15주기가 되던 해 제수씨는 대규모 회고전을 성사시켰다. 미술계에 처음으로 내 이름이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제수씨의 노력 덕분에 나와 내 그림은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화상들의 전시 개최 제안이 이어졌고, 그림은 날로 인기가 높아졌다. 제수씨의 브랜드 마케팅 감각은 내가 테오와 교환한 편지를 모아 출간한 서간집과 서간집의 영문 번역판 간행으로 절정에 달했다. 나와 테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제수씨가 손수 번역작업에 뛰어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편지 속에는 그림에 몸 바친 나의 예술관과 우리 형제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그것을 극적으로 되살릴 적임자로 제수씨 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제수씨는 그림이 재평가되는 과정에서 스토리텔링이 발휘할 위력을 알고 있었을까. 아무튼 제수씨의 헌신 덕분에 서간집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나는 일약 불세출의 화가로 다시 태어났다. 제수씨는 나의 은인 중의 은인이다.
#조카야, 고맙다
엄마의 지극정성이 아들에게 전이(轉移)라도 된 걸까, 1925년 제수씨가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이번에는 큰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조카가 나섰다. 내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조카는 제수씨로부터 상속받은 내 유작 모두를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기탁(寄託)함으로써 네덜란드 정부 차원에서 내 이름을 내건 미술관 건립 캠페인이 벌어지게끔 디딤돌을 놓은 일등 공신이다. 조카의 뛰어난 혜안은 정부가 설립한 반 고흐 재단으로 첫 번째 결실을 낳은 데 이어 마침내 1973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개관으로 유종의 미를 장식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노구를 이끌고 큰아버지 이름을 딴 미술관 개관 테이프 커팅 행사에 참석한 조카는 1978년 미수(米壽, 88세)가 되던 해까지 장수했는데, 이타적인 삶을 산 데 따른 신의 축복이라 여겨진다.
현생의 복이 지지리도 없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던 나는 동생 복에 제수씨 복에 더해 조카 복까지 누렸으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조카야 고맙다. 제수씨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