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北) 브라반트 주의 작은 도시 쥔더르트다. 원래 한 살 위의 형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사산(死産)하고 말았다. 살아 있었다면 나하고 생일도 똑같다. 남자 셋, 여자 셋 6남매 중 장남이었던 나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철이 들고서 알게 된, 피지도 못하고 스러진 형의 존재는 나의 정체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말이 없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고집스러운 성격은 그즈음 불거지기 시작했다. 동생들과의 우애를 책임져야 할 맏이였지만 테오 하고만 말을 섞을 뿐,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는 데면데면했다. 오빠답지 못한 나를 여동생들은 남 보듯 했다. 6남매 중 막내인 남동생과는 14살 터울이라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나의 우울증 이력은 꽤 오래됐다. 타고난 성격도 그렇거니와,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고집불통의 이상주의적 기질에다 물질적 혜택하고는 거기가 먼 성장환경에서 잉태된 소극적인 성향은 나를 말 없고 괴팍한 아이로 내몰았다. 설상가상, 학교라고는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쯤에 가까운 친척의 주선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한 화랑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말이 점원이지 시시껄렁한 잔심부름만 하다 하루를 다 보내는 따까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사방팔방 그림에 파묻혀 일에 몰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림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렸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실은 이때부터 화가가 될 운명이 보이지 않게 싹트고 있었던 것 같다. 한곳에 빠지면 만사 제쳐두고 몰입하는 성실성은 있었던지, 화랑 근무를 제법 오래 했다. 나름 일솜씨도 인정받아 20대 초반에는 런던과 파리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 ⓒWladyslaw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973년 개관 당시 고흐와 이름이 똑같고 고흐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조카가 여든셋 노구를 이끌고 테이프 커팅 행사에 참석해 화제가 됐다. 조카는 어머니인 봉허 여사의 유지를 받들어 반 고흐 미술관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해고 통보
그것도 잠시, 성격과 기질은 안 바뀐다고 23살 때 사달이 나고 말았다. 1876년 꽃피는 4월 어느 날, 다니던 화랑 사장은 벼락같이 화를 내며 “You are fired!”라고 고함쳤다. 따지고 보면 사장의 화랑 운영방침에 맞서 우기기를 여러 번 한 끝에 스스로 불러들인 일이었다. 아득한 먼 옛날이지만 아직도 씩씩대며 삿대질을 하던 사장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내 인생의 수난사가 본격적으로 점화됐기 때문이다.
나에게 여복(女福)은 딴 세상 얘기
#첫사랑
‘본격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해고 1~2년 전쯤 런던 시절에 겪은 첫사랑의 실패가 떠올라서였다. 내가 처음으로 춘정(春情)을 바쳤던 그녀는 아뿔싸! 이미 약혼한 몸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때 나는 확실히 알았다. 훗날 내가 보이지 않는 ‘오묘하고 드라마틱한 인간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경험이 쌓이고 삭기를 거듭해 색감과 붓질로 전이된 결과라 여겨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여복(女福)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던 나에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화업(畵業)을 생업(生業)으로 삼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881년, 피우지 못한 첫사랑의 상처가 아문 즈음에 혼자만의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20대 후반 피 끓는 청년의 뜨거운 열정은 얼마 못 가 자포자기로 꼬리 내렸다. 하필이면 사촌을, 코흘리개 아이까지 딸린 과부였을까? 역시 나는 고독을 애인 삼을 팔자인가, 자책하며 이듬해에는 다른 방식으로 구애(求愛)를 했다. 외로움을 달래려 술기운에 한 번씩 찾던 여자였는데, 유흥업계에서 일컫는 말로 직업여성이었다. 그쪽 업계 여자라고 쉽게 봤다거나, 장난삼아 찝쩍거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로서는 진심이었지만, 애당초 이심전심은 불가(不可)한 일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화, 82 x 114cm, 1885,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사랑을 갈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고민 끝에 내 생애 마지막이라 마음먹고 승부수를 던졌다. 1885년, 내 나이 32살 때였다. 당시 나는 네덜란드 누에넨 일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머물던 지역이 농촌이라 주로 농촌풍경이나 정물, 인물화 작업에 매달렸다. 일명 표현주의라는 고흐 화풍이 발흥(發興)하기 전으로 사실주의 그림들이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캔버스에 유화, 82 x 114cm, 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이 바로 그때 그린 그림이다.
#마지막 사랑
누에넨에서는 1886년 2월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한 2~3년 생활했는데, 이때 나는 마을 이웃에 살던 한 여자와 눈이 맞았다. 나보다 예닐곱 살 연상이었지만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우리는 정말이지 서로를 사랑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사랑의 참맛을 안다고, 나는 성급한 내 성질을 잘 다독이며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그 기쁨은 곧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번에는 그녀의 집안에서 나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가난한 무명의 화가라 딸의 앞날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나의 마지막 청혼 도전기는 쓸쓸하게 막을 내렸다. 이제 나는 그림에 내 모든 것을 던지리라 결심했다. 그림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기로 하고 주저 없이 예술의 본고장 파리로 떠났다. 1886년 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