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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n 25. 2021

빈센트 반 고흐의 환생(還生) 여행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③무덤 밖 첫 나들이

과거를 떠나() 미래로 나아간()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무덤 밖 첫 나들이      


#테오를 만나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선잠을 잔 탓에 이른 아침 눈을 뜬 나는 천근만근 몸이 무거웠다. 잠이 모자라면 머리도 안개 속처럼 몽롱한데,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맑았다. 이곳에 드러누운 뒤 한 번도 바깥세상 구경을 못 했던 차에 듣도 보도 못한 ‘환생 여행’ 제안은 죽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로 다가와 흥분한 나머지 뇌 신경이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끝내고 여행 가방을 둘러멨다. 준비는 끝났다. 무덤지기가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 눈이 부셨다. 130년 넘게 나하고는 인연이 없었던 태양이 나를 반겼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어찌나 맑고 푸르른지. 내 무덤을 처음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내 동생 테오도 내 곁에 나란히 누워 있다는 것을 안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 형제의 무덤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일체 장식도 없이 담쟁이넝쿨만 무성했다. 이름과 생몰년이 적힌 작은 비석만이 우리 형제를 지키고 있어 쓸쓸함이 더했다.


파리 외곽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고흐(왼쪽)와 그의 동생 테오(오른쪽)의 묘지 Wayne77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테오의 비석 쪽으로 눈길을 돌리다 숨이 멎을 뻔했다. 1857-1891, 테오가 내가 죽은 이듬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듣자 하니, 테오는 나의 죽음을 목격한 뒤 심한 우울증과 자책감에 시달리다 1891년 1월 정신질환으로 34년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단다. 자살한 나 보다도 3년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테오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또 미어질 뿐이다. 못난 형을 뒷바라지하느라 평생 마음고생만 한 너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나는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죽음으로써 새로운 삶을 맞이했다지만, 너는 형의 죽음을 애도하는 우애(友愛)가 너무 깊은 나머지 마음의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된 것이라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구나. 살아서도 너에게 죄인이요, 죽고 나서도 너에게 죄인이 됐으니 이 한 많은 업(業)을 어떻게 씻어야 할지, 막막함이 사지(四肢)를 옥죄는구나.      


#나의 제수씨, 요한나 반 고흐 봉허 여사

 참, 원래 너는 나와 따로 떨어져 네덜란드의 중부도시 위트레흐트에 잠들어있던 중 너의 아내이자 나의 제수씨인 요한나 반 고흐-봉허(1862~1925)가 1914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지. 덕분에 우리는 살아서 못 다 나눈 형제애를 이곳 영혼의 안식처에서 영원히 주고받을 수 있게 됐으니, 제수씨는 이래저래 참 고마운 사람이다. 알다시피 나의 제수, 봉허 여사는 무명 화가에 불과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존재와 가치를 전략적으로 세상에 알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은인 중의 은인이다. 살아서는 내 동생 테오가, 죽어서는 제수씨가 나를 지극정성으로 도운 것을 보면,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테오 반 고흐. Photo by Ernest Ladrey c.1888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내 동생 테오

#테오는 내 인생의 동반자

 내 핏줄이라서가 아니라 테오가 없었다면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내가 10년 동안 오로지 그림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테오의 헌신적인 지원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정신적인 격려와 위안까지 테오는 나를 위해 일생을 바친 훌륭한 동생이다. 나의 죽음이 마치 자신 때문인 양, 두고두고 괴로워하다 끝내 몹쓸 병에 걸려 내가 하늘나라로 가고 6개월 만에 내 곁으로 온 테오의 일편단심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보다 네 살 아래인 테오는 말이 동생이지, 실제로는 나의 멘토이자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였다. 밥벌이 능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던 무일푼의 나에게 테오는 언제나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변변찮은 수입으로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불평 한마디 없이 생활비와 물감값을 또박또박 부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숙비 내는 날이 지나 생활자금이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수입이 바닥나 급전을 구해 부랴부랴 송금한 사실을 숨기고 하숙비 마감 날을 착각했다며 오히려 미안해해 나를 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와 테오, 그리고 편지

 그런 테오에게 내가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은 정성을 다해 곱게 쓴 편지뿐이었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700통가량 쌓일 수 있었던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편지밖에 없어 그림 그리는 틈틈이 쓰고 또 썼기 때문이었다. 편지 속에는 나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심리상태와 현재 컨디션과 같은 신변잡담, 날씨 이야기,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 동생에게 늘 신세를 져야만 하는 민망함, 작가 노트로 여겨도 무방한 그림과 관련된 일체 내용 등 나에게 벌어졌거나,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 망라됐다. 테오도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왔다. 쌓인 편지가 방대할 뿐 아니라 편지의 내용이 다양하고 구체적이다 보니, 편지만으로도 우리 형제의 삶을 추적하는 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고맙게도 제수씨가 나도 없고 테오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이 편지들을 꼼꼼하게 간수한 것을 넘어 서간집으로 출간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 형제간의 우정과 함께 화가 고흐를 알리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고마운 점은 영어 교사 출신인 제수씨가 50대 중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 영어로 서간집을 출간해 내 이름과 내 그림을 유럽과 미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린 사실이다. 부창부수라고,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마다한 동생 부부가 아닐 수 없다.      


#테오와 나는 천생연분

 동생과 나는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피붙이면서도 천생연분이다. 아까 고갱과의 만남과 이별에서 언급한 육십간지로 본 인연 말이다. 테오는 1857년 정사년(丁巳年)생으로 붉은 뱀띠다. 십이지에 따르면 소띠가 뱀띠를 만나면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주 좋은 짝으로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피가 섞인 인연이 띠로 확인이 되고 실제 삶에서 검증이 됐다고 할까. 한 묘지에 사이좋게 가지런하게 누워 있는 것까지 동생과 나의 애틋한 우애는 더 덧붙일 게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테오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와 제수씨와의 인연도 없었을 테고, 결국 나도 지금처럼 세상에 알려지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빈센트 반 고흐, 꽃피는 아몬드 나무(Armond Blossom), 캔버스에 유화, 73 x 92cm,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나는 테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항간에 내가 테오의 결혼을 반대했다는 설이 들리던데, 근거 없는 낭설이다. 한 여자의 남편이 되면 나에 대한 테오의 관심이 옅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내가 한때 그런 생각을 내 비추었다고 누군가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는데, 그저 호사가들의 입방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나에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해 내가 그림(꽃피는 아몬드 나무, 캔버스에 유화, 73 x 92cm,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을 그릴 이유가 있었겠는가.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 가짜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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