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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Jun 25. 2021

빈센트 반 고흐의 환생(還生) 여행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①내가 권총 자살을 한 이유

여는 말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삶에 연연한 적이 없었다. 목회자의 길도, 순정을 다 바친 연애사도, 사회생활도 실패투성이였지만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거두는 것만은 끝까지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모하리만치 나 자신을 믿고 사랑한 무한 애정에서였다. 축소 지향적으로만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나는 어릴 때부터 의지와 정신력, 자존심이 남달랐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한 번도 가야 할 길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제 한 몸 건사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놈의 구원 타령이냐고 타박하는 입방아 따위에 흔들릴 내가 아니었다. 못 배우고 가난한 게 무슨 죄인가. 유식하고 돈 많은 놈일수록 잘난체하고 제 욕심 차리기에 바빠 남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걸 숱하게 본 나로서는 더욱 그랬다. 더군다나 과문(寡聞)한 탓인지, 나는 학벌과 돈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증거를 본 적이 없다.


27살 끝자락, 화가의 길로 들어설 때 나는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림은 그것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서 생명성을 부여받는다. 나에게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곧 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가난도, 무명 화가의 설움도 이 일념을 꺾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살고 세상이 죽는 길보다, 세상이 살고 내가 죽는 길을 기꺼이 가기로 했다. 세상이 살면, 내가 비록 죽더라도 나는 죽는 것이 아니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한때 목회자의 꿈을 꾼 것도, 화가가 된 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이런 소신(所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형편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림 그리기를 중도 포기했더라면, 오늘의 빈센트 반 고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나의 확신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무지(無知)가 소신과 만나면 야만(野蠻)이 된다고 했다. 신념(信念)은 사실(事實)의 토대 위에 설 때, 설득력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못 배웠지만, 무지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학습의 현장이요, 배움의 길이다.

세상은 탐욕스럽고 겉치레 학벌로 포장한 위선자보다 가난하지만 맑고 따뜻한 사람에게 손길을 내주는 법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과거를 떠나() 미래로 나아간() 화가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내가 권총 자살을 한 이유 


#자살은 삶의 다른 이름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자발적 살인 행위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섬뜩하다. 자살을 유발하는 동기는 다양하겠지만, 더는 삶을 이어갈 아무런 가치와 희망이 없을 때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생명 포기 현상이다. 자발적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목숨을 던지는 선택의 동기가 자기 의지라고 단언하기 쉬우나, 삶을 버리겠다는 극단적인 행동에 사회적 압력의 작용도 배제할 수 없어 오롯이 자기 의지로만 돌릴 수는 없다. 사회적 압력이란 경직된 제도나 배타적인 규범,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독점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횡포, 변화와 혁신을 방해하는 조직적인 압력 등을 말한다. 자기 의지의 유형은 충동적이거나 계획적인 것, 둘로 나눌 수 있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정신질환 등 질병, 생활고, 가정불화, 실연, 염세주의적 사고, 사회적 고립 등이 거론된다. 자살하는 방법도 여럿인데, 목을 매거나 수면제 과다복용,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강이나 바다로 뛰어들기, 혹은 총기의 힘을 빌리는 것 등이 있다. 일본의 무사(武士) 계급인 사무라이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명예를 지키기 위해 훈장이나 의식처럼 받아들인 할복자살도 있다.


 내 경우엔 권총이다. 내가 권총을 어떻게 구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130년도 더 된 아득한 옛날인데다, 당시 나의 정신세계는 현실과 환영, 이승과 영혼 사이를 무시로 넘나드는 자유비행을 밥 먹듯 했기에 내 기억을 나도 믿지 못한다.        


그래도 방아쇠를 당긴 날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1890년 7월 27일 해거름, 한여름 뙤약볕의 열기가 태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밀밭 사이를 뚫고 큰 포물선을 그리며 아득히 멀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총성은 생소함을 단박에 밀어내고, 오래전부터 오매불망 갈망하던 평온의 소리로 내 귓가에 달콤하게 울려 퍼졌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 이후 벌어진 일을 되살리기에는 나의 뇌 신경 탐지기가 이미 수명을 다한 터였다. 총상을 입은 가슴팍을 부여잡고 피를 철철 흘리며 1km가 넘는 거리를 기어서 집으로 왔다거나, 자살 시도 후 이틀이나 지나 숨을 거뒀다거나, 숨이 멎기 직전 내 동생의 품에 안겨 ‘슬픔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남겼다는데,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18살 무렵의 빈센트 반 고흐, 1871년경~1872년경, Vincent van Gogh: In der Provence, R.Piper & Co, Verlag, München 1977, ISBN 3492110703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내가 세상과 하직한 날은 내가 새로운 인생을 찾은 날의 다른 이름이다. 이승에서의 나의 삶은 나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회한과 고통과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스스로 죽음을 불러온 날, 켜켜이 쌓이고 쌓인 한(恨)과 절망으로 덧칠된 나의 삶은 마침내 자유와 희망을 되찾았다. 그리하여 나의 자살은 그토록 오래 잠들어있던 나의 행복을 긴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이다. 이러니 내가 세상을 저버린 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앞서 말한 대로 내가 권총을 뽑아 든 것은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묵힌 내재적 동기가 발효돼 일어난 계획적인 거사(擧事)였다. 굳이 거사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에게 자살은 죽음으로써 새로운 삶의 세계로 입문하는 주도면밀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반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

 나의 자살은 분명 자발적 의지가 발동한 결과지만, 그렇다고 순백(純白)의 자기 의지에 이끌려서만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진부하고 권위적인 목회방식을 강요하는 교단의 권력남용에 의해 선교자의 꿈이 좌절됐다거나, 아카데믹한 화풍만을 인정하는 화단의 고압적인 세력들이 ‘이단’(異端), 이라는 올가미를 덧씌워 억울하게 평가절하시킨 독창적인 표현의 자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자살 의지는 고착화한 기성 사회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이 배양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사회에서 낙오자로 누명을 덮어쓴 사람들이 지향하는 이상주의적인 성향과도 맥이 닿아 있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포부를 죽어서라도 성취하겠다는 불굴의 집념이랄까. 그런 이상주의적 의식과 행동이 있었기에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내면의 감정을 시각화하는 데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누구라도 보이지 않는 의식을 눈에 보이는 육안(肉眼)의 세계로 옮기고자 1만 시간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거기에 편집증적 기질이 병적으로 진화한 광기(狂氣)를 덤으로 갖추고 있다면 성공할 확률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카드보드에 유화, 42 x 33.7cm, 1887년 봄, 시카고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내가 내 심정이나 기분을 캔버스라는 놀이터에 마음껏 풀어 헤쳐 감정의 형태와 특성을 눈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자살의 원인도 한몫했다. 내 경우, 자살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앞서 언급한 자살의 원인 대부분이 해당한다. 정신질환, 생활고, 실연, 염세주의적 사고, 사회적 고립이 한 덩어리가 돼 자살, 즉 새 생명을 얻는 길로 나아 간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나를 ‘광기에 사무친 화가’라고 지칭할 때의 광기도 다양한 자살 원인이 한 몸을 이뤄 극단적인 정신질환으로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왜 가슴을 겨냥했나?

 법의학자들이 나의 자살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있다는데, 왜 총구가 머리나 목구멍이 아니라 가슴을 겨냥했을까, 라고.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곳을 놔두고 하필이면 가슴팍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내가 아무리 자살을 거사로 받들며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하더라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광기로 어지러움이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했는지라, 총구의 영점조준 따위에 어찌 신경을 쓸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 권총 자살이 무슨 사격훈련이나 된단 말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또한 나의 자살을 둘러싼 신비성을 부추겨 죽음 자체를 미스터리로 스토리텔링하고야 말겠다는 말만 번드르르한 작자들의 허영심이 창작한 해프닝이 아닐까, 여겨진다. 내가 오죽하면 스스로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겠는가. 하긴, 나의 죽음을 둘러싸고 분분(紛紛)한 저마다의 해석이 나름 내 그림의 명성을 높이는 데 작지 않은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호사가들은 나를 위해 아무 대가 없이 브랜드 마케팅을 기꺼이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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