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받더라도 다 써버려야 편할꺼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것 말고도 중학생이 되어 초등학교와 다른 점은 일 년에 두 번 교생 선생님이 온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잘 생긴 남자 교생 선생님 두 명이 오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여자 교생 선생님이 와서 다른 반 남자 교생 선생님들의 관심을 가져가 우리들의 공공의 적이 되기도 했다. 한 달 남짓 와서 얼마나 배우고 얼마나 가르치고 갔겠냐만은 그렇게 잠깐씩 왔다 가는 교생 선생님들을 보내며 나는 한 번도 안 울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잘 생겼었었냐 묻는다면 대답은 노! 여드름 가득한 얼굴을 한 교생 선생님일 때도 인기 없던 여자 교생 선생님일 때도 나는 항상 울었다. 물론 만우절이 되면 못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며 우르르 몰려가 조르기도 했던 친해진 분들이 떠날 때는 그 순간이 슬퍼서, 그게 아니어도 한 달 넘게 50명이 넘는 담당 반 아이들 이름을 외우랴 눈치 보랴 조례, 종례 시간마다 교실 뒤에 서있다 떠나가는 것이 싫었나 보다.
교생 선생님을 보내는 마지막 날은 나처럼 우는 아이들이 많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지금의 중 2 시절쯤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생각한다. 저마다 편지를 써서 주고 우리를 잊지 말라며 평생 연락할 것처럼 굴었으나 다음번 교생 선생님이 오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이 새로운 곳으로 쏠렸다.
'낙엽만 굴러가도 한창 웃을 시기' 라는, 또는 책에서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우리의 사춘기는 그렇게 이별에 솔직했고, 새로운 만남에도 솔직했다. 친구들과의 사소한 감정 문제로 틀어지면 아파했으며 오해가 풀려 다시 친해지면 그 전보다 진한 팔짱을 끼고 다니는,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용기 있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춘기를 벗어나 대학에 입학하며부터는 감정을 조금 더 숨기며 다니기 시작했다. 중, 고등학교처럼 같은 지역, 같은 동네 친구들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각각의 사람들로 공통 관심사가 같거나 서로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어야 친해질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그 정도로 좋아하지 않지만 성공적인 팀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하고, 같이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속으로 좋아했던 사람의 이상형이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여중생들처럼 솔직하게 아파하거나 친구들과의 대화로 힘을 얻지 못했고 '사실은 너도 딱 내 이상형은 아니야. 개 중 낫다는 거지..'라는 혼잣말로 좋아했던 감정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더 이상의 감정을 낭비 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언제 깨질지도 모르는 의미 없는 만남들이 싫증 나기 시작했고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는 중에도 내 감정을 많이 표현하면 더 상처를 받을 거란 생각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표현도 많이 못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처음 해외생활을 시작했을 때,
네 살과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여기서 어떻게 사나 처음 몇 달은 엄청 고민스러웠다. 다행히 같은 회사 주재원으로 먼저 와있던 두 가족의 도움으로 무리 없이 정착할 수 있게 되었고, 해외에서 서로 돕고 살자는 취지의 한인 카페에도 가입을 하여 많은 정보를 얻곤 했다. 주재원의 특성상 몇 년 후면 떠날 것이 예정되어있기에 현지 교민들은 우리와 많이 친해지는데 한계가 있었고, 같은 처지의 주재원 가족끼리 모이기 마련이었다.
같은 유치원에 보내는 마음이 맞는 언니, 동생을 알게 된 후 나는 다시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또는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 놓고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처음에는 모닝커피를 마시다 점심을 먹게 되고, 유치원이 끝나면 아이들을 이 집으로 저 집으로 데리고 다니며 그룹 활동도 만들고 일종의 공동 육아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매일 여느 중학생들처럼 깔깔거리며 웃었고 주말보다 유치원 보내는 주중이 기다려질 정도로 그렇게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 3년의 주재 생활을 접고 셋 중 내가 가장 먼저 다른 나라로 발령을 받아 떠나는 날 우리는 엉엉 울며 우린 계속 볼 사이니까 울지 말자고 카톡이 있으니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고 방학에 한국 가서 만나자고 신신당부를 하고 헤어졌다. 내가 떠난 후 나머지 두 명도 시기를 달리해서 한국으로 귀국을 했고, 나는 그 이후 한국에서 그들을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한때 가족보다 나에 대해 훨씬 많이 알던 자매 같은 사이였는데, 자존심 내려놓고 만날 수 있는 사이였는데, 단지 나라가 바뀌었다고 이렇게 소홀 해질 수가 있을까. 나는 다른 나라니까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둘은 한국 복귀 후 만난 적이 없단다.
두 번째 발령지에서도 초창기에는 그들과 연락도 자주 하고 소식도 자주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들 원래 삶으로 돌아가서 적응하느라 바빴고 나 또한 새로운 나라에서의 커뮤니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예전의 내가 될 수 없었다. 어차피 몇 년 후엔 또 멀어지게 될 텐데.. 정을 조금만 주자. 지난번 헤어질 때처럼 힘들지 않게.. 새로운 나라에서 사귄 친구와는 예전만큼 같이 커피를 마시는 횟수도 점심을 먹는 횟수도 줄었고, 만날 때는 누구보다 친하게 느껴지지만 안 만날 때는 연락이 없어도 덜 섭섭한 감정 낭비 없는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다. '그래, 이편이 더 편할 거야' 그렇게 나는 조금씩 감정을 숨겼다. 한 번 해봐서 그런지 두 번째 이별을 할 때 나는 그 전보다 조금 담담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 번째 발령지에서 산지 거의 4년이 되어간다.
안 그래도 한국인이 별로 없는 나라라 예전 같으면 시내를 지나가다 한국인인 것 같다 싶으면 먼저 아는 척도 하고 그랬을 텐데 지금은 그들이 말을 걸지 않으면 그냥 지나친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텐데... 내가 챙길 수 있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차라리 더 조금 챙기자.' 철저한 개인주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다. 아껴서 뭐 할껀데? 많이 쓴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10여 년의 해외생활에 나에게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몇 안되고 그 나머지는 의미 없는 시간들이었다 해도 행복하게 웃었던 그 시간 시간들이 있으니 난 그곳에서의 하루를 즐겼으며 그렇게 한 달을, 일 년을 잘 버텼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만 봐서는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이 허무하지만 때로는 감정 낭비가 그 당시에서는 최선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지금도 나는 어느 정도는 감정을 써가며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법을 안다.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되 준 것만큼 받지 못한다고 섭섭해하지 않을 관계를 맺자. 같이 만나면 즐겁고 헤어질 때도 즐거울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이 좋겠다는 게 10년 넘게 해외에서 살며 터득한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또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이번엔 아주 기쁘게 이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