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한달음에 달려오는 것

마음을 달래는 시간

by 쑥자람

오후 한 시. 병원을 나섰다. 며칠 전부터 겁에 사로잡힌 조직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한 겹 덮인 천을 벗긴 것처럼 가슴이 탁 트였다. 누구의 부축도 없이 혼자서 조직검사를 마쳤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집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최고 기온이 37도까지 치솟는 미친 날씨였다. ‘헉’ 소리와 함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정도의 날씨였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에게 연락을 남겼다.


“오늘 폭염 경보래”

“오빠 오는 길 너무 힘들 것 같아”

“퇴근하면 연락 먼저 줘요!”


그리고 곧바로 날아온 문의 답장.


“나 쑥이네 가는 버스 기다리는 중”

“어차피 여름이라 맨날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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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침대에 누워 있는데 스르르 도어락이 열렸다. 침대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말했다.


“오빠 왔어~?”

“쑥쑥이 안 자고 있었어~?”


침대를 빠져나와 문에게 가까이 갔다. 문은 그러거나 말거나 냉장고 앞에 백팩을 내려 놓더니 내가 좋아하는 탄산음료를 백팩에서 가득 꺼내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휴’ 숨을 돌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


“쑥쑥이 안 울었어?”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답했다.


“그럼! 하나도 안 무서웠어!”


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 우리 쑥쑥이 그런 애 아닌데?”


그 말에 입이 쭈욱 나왔다.


“…사실 진짜 무서웠거든.”


문이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야 나는 온 긴장이 와르르 해제되며 그의 티셔츠 허릿춤을 붙잡고는 뿌엥-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무서웠어. 엄청, 엄-청 무서웠어 ㅠㅠ 조직검사 같은 거 다시는 안할거야ㅠㅠ”


에어컨을 시원하게 틀어 놓았는데도 문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그대로였다. 이 폭염을 뚫고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와주다니…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시원한 토너를 적신 화장솜으로 그의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쑥쑥이 한숨 잤어? 이리와 한숨 자자!”

“나 하나도 안 졸린데!”

“환자분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이리 오세요~”


문은 먼저 침대로 올라가더니 왼쪽 팔을 쭉 펴고는 고개짓을 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이상하게도 문의 팔을 베자 잠이 솔솔 몰려왔다. 분명 방금 전 혼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잠이 오지 않아 유튜브를 틀어 놓고는 멀뚱멀뚱 누워만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조직검사 한 부위로 온 신경이 집중되면서 손발이 저릿저릿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의 팔을 베고 눕자 잠이 쏟아졌다. 신경을 분산시킬 영상이 틀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했고, 그 조용함이 약보다 낫게 느껴졌다.


“이상하다 나 잠들 것 같아~”


문의 토닥임을 받으며 깊은 낮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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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바깥이 어두웠다. 여전히 문의 팔을 베고 누운 채였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우리 오빠 저녁 먹여서 보내야 하는데…’ 하며 조심조심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은 새근새근 깊은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새벽 출근을 하고는 퇴근하자마자 지면이 가장 뜨거울 때 우리 집으로 와주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한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촉촉해졌다.


조심히 왼팔을 들어 그의 머리와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배달 앱을 켜고 이것저것 메뉴를 기웃거리다 문을 불렀다.


“오빠, 돈카츠, 초밥, 육회, 족발, 치킨… 이 중에서 뭐가 제일 먹고 싶어?”


그러자 두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리며 들려오는 대답.


“쑥쑥이 먹고 싶은 거. 쑥쑥이 가슴이 먹고 싶어 하는 거….”

“... 내 가슴은 밥을 먹을 수가 없는데…”

“쑥쑥이 몸이 원하는 거 먹어야 해. 그래야 상처 빨리 아물어…”

“아니야. 오빠 먹고 싶은 거 시킬거야. 뭐 먹을까?”

“음… 족발”


족발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문의 동그란 배를 쓰다듬었다가 손끝으로 툭툭 튕기며 놀았다. 그러는 동안 문은 여전히 쿨쿨 잤다. 그러자 어이없는 웃음이 픽 하고 튀어 나왔다.


‘아니 간호해주겠다며? 지금 누가 환자야 도대체??’


어딘가 우리 둘의 역할이 바뀐 것 같아 한참을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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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족발 배달 완료됐대~”


문은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언제 잠에 들었었냐는 듯 상을 차렸다. 상을 차리고, 앞접시를 준비하고,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고, 비닐 장갑을 끼고 주먹밥을 만들고….


“나도 할래. 나도 도와줄래”

“어허. 환자는 가만히 있으세요”


문은 쌈도 싸서 먹여주는 것은 물론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완벽하게 했다. 내가 뭔가를 도우려 하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문이 환자 같았고 내가 보호자 같았는데….


온종일 무거웠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씩 가벼워졌다. 새벽 근무를 마치고, 가장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도 서둘러 내게 달려와 준 그 사람 지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걸어와 곁에 조용히 머물러 준 그 손길 덕분에 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받았던 긴장과 불안은 여전했지만, 그의 팔베개와 끝없이 이어진 다정한 배려가 긴장과 불안을 덮어줬다.


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나를 든든하게 한다. 조용히 내 숨소리에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숨결은 나에게 가장 큰 평화와 안정이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내 두려움은 조금씩 물러간다. 문이 내 곁에 묵묵히 있어준다는 것, 그것만으로 두려움을 충분히 이겨낼 힘이 난다.


그래서 나는 오늘, 덜 외롭고 덜 무섭게 견뎌냈다. 그가 있어 참 다행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안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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