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룸메데이
동거인(이하 룸메)의 생일을 축하할 겸 우리만의 신년회를 위해 집이 아닌 밖에서 놀기로 약속한 날이다. 한집에서 매일 얼굴을 보지만 따로 날을 잡지 않으면 좀처럼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다. 바쁘다 바빠(룸메), 노는 거 최고(나)의 조합인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미리 날짜를 잡아야 한다.
제 1회 룸메데이의 성공을 위해 먹는데 진심인 나는 며칠 전부터 어느 동네로, 뭘 먹으러 갈지 고민했다. 서촌에 좋아하는 파스타 집인 김씨 뜨라또리아에 가려다(점심런치 코스가 아주 훌륭함) 동네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후기를 보고 바로 예약을 했다.
대학원생 두 명, 페이퍼 기간 정말 예민할 때 거 든요
문학 전공자들이 감동한 감수성 있는 곳입니다
룸메도 대학원생이라 논문 기간에 대학원생들이 얼마나 예민하고 바쁜지 옆에서 지켜보니 정말 안타까웠다. 다른 이도 아닌 대학원생 두 명 심지어 문학 전공자들이 감동한 곳이라니! 심지어 동네에 있어서 집이랑도 가깝다. 안 갈 이유가 없다.
프렌치 레스토랑은 우리가 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골목에 있었다. 늘 지나는 길로 다니다 보니 처음 와보는 골목이었다. 골목마다 작고 소박한 카페와 식당들이 있어서 새로웠다. 앞으로는 일부러라도 새로운 길로 걸어봐야겠어. 아파트 단지가 아닌 주택과 빌라가 많은 곳에 사니 골목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이날 식당 가는 길에 맛있어 보이는 식빵 가게를 발견했는데 벌써 두 번이나 식빵을 사 먹었다. 큐브 모양의 식빵인데 전자레인지 2분 돌린 뒤 손으로 찢어먹으면 정말 따뜻하고 맛있다. 또 이렇게 살찌는 맛을 알아버렸다. 밥을 다 먹고도 후식으로 식빵을 뜯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뱃살 눈감아.
프렌치 레스토랑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이었다. 어니언수프, 뇨끼, 파스타, 샐러드를 주문했는데 (첫 끼니 푸짐하게) 음식들이 정성스럽고 맛있었다. 음식에 대한 설명도 친절하게 해 주셔서 맛이 더 풍부하게 느껴졌다.
분위기, 맛, 잔잔히 흐르는 음악 정말 다 좋다.
근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룸메랑 집에서 마주 보며 밥 먹을 때 와는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괜히 뻘쭘해서 "우와 뇨끼 진짜 맛있다. 먹어봐"라며 음식으로 시선을 던지고 어색함을 지우려 했다.
결혼한 친구들이 남편이 집에 있는 가구처럼 느껴져서, 일부러 외식도 하고 밖에서 데이트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평소처럼 밥을 먹는 건데 장소가 바뀌자 우리 사이의 공기가 달라진 거 같다. 이제 우리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서로에게 가장 익숙한 장소가 됐나 봐!
우리집 식탁이 아니라 레스토랑 식당에 마주 앉은 우리는 평소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룸메는 올해 대학원 석사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할지, 박사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뭐든 신중하게 고민하고 잘할 친구라 어떤 선택이든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날 식사를 하면서 두 선택지를 두고 어떤 점 때문에 고민인지, 무엇을 고려하고 있는지 등 더 내밀한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에 집에서 나누는 대화가 일상적이고 편안하고 가볍다면, 이날 우리가 나눈 대화는 또 달랐다. 앞으론 룸메랑 종종 이런 시간을 가져서 대화의 온도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룸메와 함께 살며 가벼운 대화도, 밀도 있는 대화도 풍부하게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이제 배를 채웠으니 마음의 양식을 채워 보자며 룸메가 가고 싶어 하는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를 만났다! 이 동네에 사는 내내 방앗간처럼 수시로 드나들고 싶은 곳이다. 이제 빵 사 먹을 돈으로 책을 사야겠어. 뱃살도 빠지고 마음도 풍요로워지고 일석이조.
동네 서점은 작고 단정한 분위기였는데 사장님의 큐레이션이 돋보였다. 책방에 있는 것만으로 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서가에 꽂힌 책들을 구경만 해도 좋을 거 같았다. 그렇게 찬찬히 책들을 구경하다가 블라인드북을 발견했다. 블라인드 북에는 사장님의 간략한 책 소개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블라인드북을 한 권씩 선물하기로 했다. 블라인드북이라니. 어떤 책일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소개글을 읽으며 룸메에게 무슨 책을 선물할지 고심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엄청나게 재밌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익숙하던 세계가 완전히 낯설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바꾸진 못해도, 지금의 당신을 바꾸기에는 충분할 거예요.
브런치를 쓰기 위해 일상에서 글감을 찾는 나에게 재격이라며 룸메는 이 책을 골랐다.
방치되어 있던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나로 존재하려는 당신에게도 용기가 되기를. 자유를 가지려는 여자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앞둔 룸메의 변화와 성장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했다.
근처 카페에 가서 블라인드북의 포장을 뜯으며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크리스마스 때 선물상자를 열어보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책을 모르니까 더 읽고 싶고 무슨 책일지 기대가 됐다. 특히나 내 책의 소개글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변화를 위한 강력한 연금술사 책을 가진 기분!
포장을 뜯어보니 둘 다 전혀 예상치 못한 책이다. 평소라면 고르지 않을 SF 장르의 소설(나)과 처음 보는 외국 작가(룸메)의 수필이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서 웃기다. 그래 인생이 우리 예상대로 흘러갈 리가 없잖아. 새로운 세계로 가보는 거지, 라며 긍정회로를 돌렸다.
올해는 예상치 못한 블라인드북처럼 즐거운 모험이 가득한 해이면 좋겠다. 제 1회 룸메데이 대박 성공적!
아직 블라인드 북은 읽지 못했는데 이번 설날에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