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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2. 2021

오늘의 서술, #10 악당

#10 악당

  영화에서는 수많은 악당이 나온다. 스테레오 타입의 악 그 자체인 악마도 있고, 보는 내내 애잔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는 이도 있다. 냉전이 끝나고 동구권이 해체된 후에도 007이나 여타 액션 영화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여전히 악당으로 남아있었는데, 세기가 바뀌고 나서야 종적을 감췄다. 요즘엔 인정받지 못하는 자의 인정 욕망의 화신이 자주 보이는 것 같다. 아니면 본 시리즈처럼 내부의 적을 상정한다거나. 시대에 따라 악당의 면모가 바뀌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악당의 가면 속에는 하나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아의 얼굴.

 
 ‘어른’이라는 단어는 얼우다라는 말에서 왔다. 얼우다는 성교하다는 의미다. 이 말은 하고 안 하고의 육체적 관계로만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선 정신적(혹은 사회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른은 타인과 관계에 있어 배려나 타협 등의 사회적 스킬이 아이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악당을 보면 대화가 안 통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독단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장난감을 안 사주면 매장 바닥에 드러누워 생떼를 부리는 아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이 다분히 일방적이며 합의점을 만들어 갈 의지도 생각도 없는 유아적인 마인드라고 봐야겠다.

 
 
타노스를 예로 들어보자. 우주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생명체는 늘어나고 있다. 더 이상의 팽창은 자멸이다라는 생각으로 전 우주의 생명체 반을 날려버리기로 한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데 있다. 전 우주의 생명체에 투표권을 주고 절차적인 합의를 통해 진행하기로 했다면 어떨까? 현실에서도 민주주의 절차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고 폭격도 일어난다. 타노스가 악(아기)이고, 강대국의 폭격 명령이 악이 아닌 이유는 최소한의 합의를 거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얼우었느냐 아니냐의 차이.

 
 
나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이상향이나 바라 마지않는 세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데 옆에 사람들이 불행하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신은 웃음이 끊이지 않겠지만, 결국 불행으로 인한 분노와 눈물로 익사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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