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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2. 2021

오늘의 서술, #5 직업, 형용사

#5 직업, 형용사


  명사형 꿈을 꾸지 말라는 글을 어디서 봤다. 의사, 변호사, 정치인처럼 직업 그 자체가 아닌, 사람을 돌보는 일이라던가,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라던가, 세상의 다툼을 진정시키고 잘 살게 하는 일처럼 동사의 형태여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글이 짧아 디테일한 맥락은 짚지 못했지만 수긍이 가는 내용이었다. 동사형 꿈을 꾸는 사람들에 비해 명사형 꿈을 꾸는 사람이 그 직업을 수행함에 있어 따르는 명예나 부수적인 것들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라는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위험성이 클 수는 있을 것 같다. 사람을 고치는 일보다, 의사라는 직함에 전념하다 보면 최근 코로나 휴업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직함에 갇히게 되면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도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 직업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가치가 있을 텐데, 그 가치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하지 못한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을 슬프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사는 명사보다 구체적인 형태이니 어떤 선이 있을 때 그 선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 형용사라는 제목이 특이한 루마니아 영화가 있다. 경찰이 주인공인데, 마약 단속을 하는 형사다. 대마초를 거래하는 고등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체포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망설인다. 곧 대마초가 합법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문제로 상관과 다투다 사전까지 펼치게 된다. 이 영화는 경찰도 양심을 가질 수 있나라는 질문을 한다. 실정법을 어긴 사람의 체포를 두고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다소 과장된 수사는 치워두고 핵심만 들여다보자면 경찰이라는 명사가 아닌, 치안을 유지하고 구성원의 신체와 재산,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사안을 두고 고민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감독의 의중일 게다.


  사회를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선 간단명료한 체계도 필요하겠지만, 간단명료함의 사전 작업을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있어야 하겠다. 경찰은 두 글자이지만 그것의 꾸밈말은 한없이 길고 디테일해야 할 것이다.  π처럼.


  그러고 보니 나의 꿈은 20대 중반부터 명사형이 아니었던 듯싶다. 경찰, 변호사, 건축가, 사서 등등 전전하다 언제부턴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게 되었다. 그렇게 꿈을 가지다 보니 어떤 직업이든 괜찮았다. 꿈꾸던 직업이 없으니 실패할 일도, 그만두더라도 세상 무너질 일도 없었다. 다음 자리에서 내 꿈을 펼치면 그만이었다.


  언젠가 중립국을 찾았던 어떤 분이 생각난다. 서울도 아닌 멀리 세종시에서 왔던 분이었는데, 그날 본 영화가 ‘알제리 전투’였다. 반프랑스 식민 저항을 하던 레지스탕스를 다룬 내용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영화를 안 보신 것 같았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고 그분이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흥미 위주의 영화도 아니고 이런 작품들을 보는 데는 열정 같은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직까지 그런 게 있냐는 질문이었다. 덧붙임 말이 있었다. 본인은 지금 공무원이고 몇 년 준비를 하다 합격해서 지금은 세종시에 있다는 말을 했다. 예전에는 예술영화도 더러 보고했는데, 요즘에는 안 보게 되더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마침내 바라던 바를 이뤄낸 사람이 몰두하던 어떤 것을 그만두면 공허할 수 있을 테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직업 외적인 것보다는 직업 안에서도 무언가 찾아내길 바란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그 시간이 공허하면 너무 슬프지 않나. 동사의, 형용사의 삶을 사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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