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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3. 2021

오늘의 서술, #45 비 오는날

#45비 오는날


 손창섭의 소설집을 읽고 있다. 얼마 전까지 읽었던 책에 그의 단편 소설 “미해결의 장”의 일부가 발췌되어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운동장에서 발랄하게 놀고 있는 작은 아이들을 보고 지구를 갉아먹을 바이러스의 유체로 서술한다. 아직 읽는 중이지만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안쓰럽고 딱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어디 뒤틀린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 없다. 전후 시기의 군상을 그리고 있어서 그런지 파괴된 생활과 의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첫 단편의 제목이 “비 오는 날”인데 비 오는 오늘 읽기 좋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접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 비 오는 날, 손창섭

 

 손창섭은 1922년 생이다. 소설집의 작품들은 대부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쓰여졌다. 최근 작가들의 책이나 번역이 된 해외 고전을 읽다 보니 현재의 언어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 느꼈다. 어려운 문장은 아니지만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입체감이나 색감을 찾아내기가 더딘 느낌이랄까. 같은 삶의 어려움일지라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갑질을 당하는 현대소설의 내용과는 또 다른 맛이다. 옛 단어와 문체로부터 오는 것인지 전후시대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거리감이 묘하면서도 좋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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