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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ugae일공오 Jun 03. 2022

아무렇게나 걷기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정하지 않은,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상관이 없는, 그런 날이 좋다. 


가끔 일이 일찍 끝나거나, 약속 상대와 생각보다 빨리 헤어졌을 때, 나의 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달린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어떻게 사용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도 모르는. 그런 날에는 익숙한 공간으로 먼저 간다. 예를 들면, 삼청동? 삼청동으로 버스를 타고 간다. 나는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한다. 지하철은 왜인지 모르게 너무 답답하고, 환기가 전혀 안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사람들이 앉아있거나 서있는 모습들이 감정 없는 조각상들처럼 보인다. 버스의 덜컹거림과 그 움직임에 어울리는 소음들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사람들이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을 때, 창문에 비치는 사람의 표정과 그 뒤로 비치는 배경들이 좋다.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으면 서울공예박물관이 있다. 그 옆에 나있는 길로 들어서면 찬란한 나무들이 나를 반기고, 가끔은 마술을 하는 사람이, 때로는 전자바이올린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있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자리 잡고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현실이 무엇인지 잊기도 한다. 그러다 누군가 나를 바늘로 찌르듯 예기치 않은 소음이나 터치에 정신을 문득 차리고 다시 길을 걷는다. 


바람이 내 볼을 부드럽게 지나갈 때, 눈을 감고 그 바람을 꼭 느낀다. 이 모습을 본 내 친구들은 '졸리냐?'라고 색 없는 문장을 뱉으며 나의 감흥을 깨지만 지금은 나 혼자니 전혀 상관없다. 바람에 햇빛 냄새가 섞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따스한  노란색이면서도 주황색인 빛이 코를 지나 내 안에 천천히 온기를 퍼트린다. 이 따스함은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주어 이제는 낯선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이제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선택해 들어간다. 인터넷 지도는 전혀 켜지 않은 채, 길이 막혀있으면 돌아가고 골목 구석구석에 있는 가게들과 벽의 문양과 지나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걸음걸이.. 하나하나 눈으로 음미하며 자꾸 새롭고 낯선 길로 들어선다. 이 순간만큼은 굉장히 용기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이렇게 낯선 장소에서 한순간도 발걸음을 멈칫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선택을 하며 나아가다니! 왠지 오늘은 집에 가서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계속해서 걷다 보면 천천히 걸음은 느려지고 발바닥도 슬슬 아파온다. 달달한 아이스 라떼를 마시며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한다. 천천히 코로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 호흡으로 인해 느껴지는 주변 공기와 물체들,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천천히 채워 넣는다. 


이제 다시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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