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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틈 Jul 22. 2021

내 나름의 죽음 준비

과거와 현재의 공존

  죽음은 나에게 있어 양날의 검과 같다. 죽음은 나를 좀 더 이롭게 살도록 이끄는 장치이면서 인생에 피곤한 훼방을 놓는다. 나는 죽음을 언제나 염두에 두며 사는 편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죽음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살아가는 데 비해 나는 꾸준히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 물론 당장 죽을 사람처럼 열과 성을 다하며 절박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고려하며 사는 내 나름의 의식이 있다면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것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입 밖으로 그 음성을 내뱉는 것이다. 이 의식은 대학에 입학하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치러졌다. 누구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불가피한 불행이 찾아왔을 때, 최소한의 후회를 하기 위해서 선택한 최소의 방법이다. 


  내 의식의 속사정을 털어놓는다면 그 사연은 이렇다. 초등학교 6학년, 암 투병을 하시던 할머니가 끝내 돌아가시고 어린 내 삶은 후회와 절망으로 범벅되었다. 너무나 부끄럽고 나 자신이 미워서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나는 큰집에서 할머니를 뵀었다. 그게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 TV를 보는데, 나를 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직도 그 시선이 생생하다. 13살의 나는 뭐가 그리도 부끄러웠던 걸까. 마음속에는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말해야 된다는 직감이 계속해서 맴돌았지만 애써 그 소리를 무시하고 할머니의 시선을 외면했다. 오른 뼈와 근육이 마비가 된 것 마냥 잘은 신경만 삐죽 댈 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앞만 바라봤던 어리석은 나의 행동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 어렸다는 핑계를 대며 후회를 무마시키려고 해도 명백하게 사랑을 고백했어야 하는 순간 용기 없었던 그 목석을 용서하기란 참 힘이 든다. 이후, 하늘에 계신 할머니께 사랑한다고 수천 번, 수만 번을 넘게 고백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난 과거에 빚진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기 전에는 반드시 '사랑해'라고 끝인사를 건네는데 처음에는 낯간지럽고 어색했지만 익숙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내가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거창한 이유에서 비롯된 그 사소한 사랑한다는 말은 참 이로운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저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와 이내 공중에 사라지는 단순한 어절일 뿐인데 소리는 무성의 형태가 되어 상대의 마음에 안착했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니 상대방도 머뭇거리며 사랑한다고 답해주었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통화가 끝이 나면, 대화의 질감이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분홍빛의 부드럽고 따스한 질감이었다. 이제는 밥 먹듯 사랑한다고 말해 그 질감이 매번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건넬 수 있는 환경은 여러모로 이득밖에 없을 것이다. 묵혀두고 아끼다 정작 필요할 때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들을까? 마음으로만 되뇌는 것과 말로 전하는 것의 온도는 다르다.


  반대로 죽음은 내 삶에 강박으로 다가온다. 후회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불안이 더욱 극심해지기도 해서 피곤을 배로 얹고 산다. 과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해야 할 일과 죽음만을 생각했을 때 해야 할 일에는 괴리가 있어서 선택들이 와해되기도 한다. 이렇게 피곤하게 사느니 그냥 마음 편히 죽음 따위 고려하지 않고 눈 딱 감고 살아볼까 고민도 된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죽음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겠다는 결론으로 수렴된다. 내가 죽음에 대한 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는 건 우리는 죽음에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통제할 수 없고 예상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손을 놓고 외면하기엔 죽음은 너무나 명확하게 다가 올 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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