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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May 15. 2016

왜? 시베리아, 드디어! 시베리아

홀로 떠난 시베리아 환상열차 탑승기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28년 기억을 되돌아봤을 때 내 삶은 시베리아 여행 전과 후로 나뉜다.

한 달 벌이, 소속, 하루 일과 같은 보이는 면들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지만, 놀이공원 회전 찻잔 같이 빙빙 돌던 마음속 태풍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하루를 느끼는 감촉이 달라졌다고 말해야겠다.





시베리아 열차여행의 시작은 햇살이 먼지처럼 내려앉은 블라디보스토크 역의 플랫폼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사라 3박 4일간 마실 물과 과일, 빵 그리고 여행가방을 들고 계단을 낑낑 내려왔다.

몸을 움직인 탓에 낯선 나라에서 느끼던 은근한 긴장감이 풀려 플랫폼 의자에서 곤곤히 졸았다.

산들바람처럼 귓등을 스쳐 흐르는 이해 못할 러시아어도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이 나른한 기분은 시베리아 열차를 타는 내내 이어졌다.


나무,   자작나무,   노란 단풍. 사람들, 푸른 물, 뾰족 지붕 -  노을 -  밤 - 달, 새벽.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자연의 파노라마는 '시베리아'라는 단어가 주던 차갑고 생경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가장 여유롭고 편안한 시간을 선물해줬다.   





시베리아 열차는 다양한 등급과 3가지 종류의 객석이 있다.


표를 예약하러 가면 열차마다 번호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열차 번호가 작을수록 시설이 좋은 열차이며, 99번 열차는 지옥을 선물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열차 내 객석에는 8인실(사실상 오픈형), 4인실, 2인실 3종류가 있는데,  취향에 따라 정하면 된다. 여러 사람을 만나려면 오픈형을 고르면 되고, 나처럼 편안한 시간을 바란다면 2~4인실을 고르면 된다.


나는 2번 열차의 여자전용 4인실을 골랐다.


엄마, 딸, 새댁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서 한 칸에서 지냈다.


엄마는 처음 나를 봤을 때, 어린 딸을 보호하는 어미의 본능 같은 경계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엔 왜 왔니?". 엄마가 물었다. 러시아 말을 못 하는 나는 여행책자를 뒤적여 적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오고 싶었어.'

그러자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이름을 물었다. 'Hannah'라고 적자 "안나!"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그 열차 속에서 안나라는 소녀가 되었다.



햇살이 잘 드는 환상특급열차 속에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지구 여행자가 되었다.

가끔 심심할 때면 복도에 나가 옆방 사람들과 얘기하고, 러시아 아저씨들과 포카를 치기도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정말 모른다. yes, no. 도 모른다.

그래서  평소 수다스러운 성격도 숨겨졌고, 눈빛으로 말하는 신비로운 아이가 되었다.


여행을 자주 다닌 탓에 말을 못 알아 들어도 대충 눈치로 알아듣는 편인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데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인 줄 알았다고 했다. (물론 이것도 눈치로 알아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다..)


엄마는 나를 딸처럼 챙겨줬다. 버터와 설탕, 뜨거운 물을 넣은 오트밀. 버터 같은 돼지비계를 올린 크래커, 뜨거운 물을 부으면 매쉬포테이토가 되는 가루 등을 챙겨줬고 같이 식사를 했다. 뜨거운 물이 제공되는 열차에 특화된 음식들이었다.

나는 과일과 도시락 컵라면을 건넸다. 정말로 러시아인들은 도시락 컵라면을 일상적으로 먹고 있었다.


적어도 그곳에 있는 동안 우리는 한 가족이었으며 마치 영원히 그곳에 머무를 듯 안정된 생활을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러 간다 말했을 때 주변의 가장 흔한 반응은

"왜?"

였다. 놀라움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이 질문엔 대답을 하기에 막막했다.

왜냐면, 나도 왜인지 몰랐다. 딱히 왜 가야겠다, 뭘 보고 싶다 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친구가

"드디어 가는구나."

라고 말한 걸로 봤을 때, 적어도 16살 이전부터인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


열차를 타는 내내 식사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글을 쓰고, 읽고, 듣고, 그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시간이 필요해서 나는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싶었다. 지루하기 위해, 이 열차가 타고 싶었다.


시베리아 열차는 모스크바 시간을 기준으로 시간표가 짜여있는데, 몇 번이고 언제인지 모르게 시간의 경계를 건너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차를 타는 동안 나는 시간을 잃어버린다. 이곳이 이 순간이 몇 시인지, 그 누구도 정확히 세고 있지 않는다. 달빛을 따라 건너는 나룻배처럼 시간의 바다에서 망망히 떠다닌다.

철로 위를 달리며, 시간에서는 탈선한 그 위안감.

화살같이 착실히 과녁으로 날아가던 한국에서의 시간이 싫어 이 열차를 탄 것이었다.   



변신 이야기. 1Q84. 내 곁에 있는 사람. 십이야. 유라시아에 관한 역사책. ECM Travel. 등 장르도 다양한 책들을 한가득 들고 탔고. 기꺼이 읽어 내려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나라에는 마땅한 여행 안내책이 없어서 론리 플래닛의 Siberian Train책자를 많이 활용했다. 열차 속에서도 종종 읽으며 지나가는 역에 대한 정보를 얻고는 했는데, 이 책을 한글로 판매하면 시베리아 열차 탑승을 준비하는 한국 여행자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거란 생각이 들어 번역을 하고 싶단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왼쪽에서 뜨고 오른쪽으로 지는 해와, 푸른 안개로 내리깔린 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고 기록했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이 열차를 상상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근 10년이 넘게 뇌 뒤편에 잠자고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어린 나는 이 열차 안에도 별이 떠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스름한 구름 위에 점점 별빛이 흔들리는 조용한 사각 공간.

그 공간을 꿈꿨고, 지금 내가 거기 있었다.


행동의 속도, 생각의 속도, 마음의 속도가 제각각이던 내가

이곳에서 태엽을 감으며 나의 속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안나."


마지막 날 밤 새벽 엄마가 나를 작게 깨웠다. 목적지인 이르쿠츠크 근처 울란우데 역에 진입하면서, 그동안 넓게 펼쳐졌던 초원과 완전히 다른 광경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바로, 바이칼 호수이다.


해가 뜨기 전이었지만 평소보다 밝았다. 달이 하늘과 물 위 두개로 떠 있었다.

끝이 없는 물결.

호수 주변을 밝힌 주택의 불빛들이 아니었으면, 바다라고 생각할 만큼 광활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푸른색은 본 적이 없었다. 동화책에서 그려놓은 푸른 밤의 풍경이 이거였구나.

사진을 찍어도 찍히지 않아, 그냥 눈으로 담고 느끼기로 했다.


딸은 잠을 이기지 못해 다시 잠들었고, 새댁과 엄마는 작은 속삭임으로 놀라움을 연발했다.

마치 요정들이 호수 속에서 말을 하는 것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열차 속에 고요함을 초대했다.


달, 달, 호수, 물결.


환상적인 시간들을 달려온 우리에게 내리기 전 마지막 추억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한 시간쯤 더 달려 이르쿠츠크 역에 다 달았고, 엄마는 짐을 다 챙긴 후 나에게 한참을 러시아말로 얘기했다.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새댁이 나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Good Luck, She said."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시베리아 환상열차의 시간은 끝이 났다.


4시간을 차로 더 달리고 배로 건너 바이칼 호수 속 섬인 후지르 마을에 다다랐다.


그곳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Rene이라는 친구를 얻고,

러시아 주정뱅이 아저씨와 보드카를 마시고,

오물이라는 생선회를 먹고,

호수와 설산과 하늘을 보며 여기서 생명이 시작됐나 보다 생각하고,

반야라는 러시아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친 후 눈에서 구르고,

자작나무 숲에 들개와 누워 있어 봤다.




사실 열차에서의 시간이 너무나 강렬했고, 여독이 쌓여서 바이칼 호수의 유명한 명소를 찾아가는

'남부 투어'나 '북부 투어'는 떠나지 못했다.

다만 후지르 마을 중심부에 머물며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는,  

열차의 연장선 같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시베리아 여행을 하기 전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만족했다.

다만 그런 것을 꿈꿀 수 있다는 점만으로,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철부지였다.

여러 여행을 다니고, 일탈을 즐기는 듯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겁쟁이였다. 철저한 계산으로 손익분기점 아래의 일탈만 하는 위선자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갈증이 있었다.

속도의 불일치, 마음속 태풍 같은 불안정함은 의미 없는 일탈을 반복하게 했다.


그냥 어느 날 '진짜로' 떠나 봐야겠다, 모험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떠났고, 동양의 신비로운 소녀가 되어보았고,

시간의 조각배 위에서 밀리고 빚진 책들을 읽었고, 쓰고 그렸다.


이 여행을 끝으로, 의미 없는 일탈은 그만뒀다.  일상의 아름다움에도 충분히 감탄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시베리아 환상열차 속 가장 갇힌 시간을 지나며

드디어, 자유를 찾은 것 같다.


이제는 시베리아를 향해 떠날 사람에게 내가 묻고 싶다

거기는 왜 가시냐고.


또 그곳을 지나온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싶다. 드디어 가셨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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