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 39살. 교수/박사 3년 차. 미래 시나리오 준

꿈에 그리던 글로벌 무대에 첫 발을 내딛다.

by Dr Kim

2019년 박사 3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학교로 산학교수로 온 지 4년 차가 되었다. 그동안 학교에서는 감사하게도 강의 평가가 좋아서 3년 연속 석탑강의상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매년 산학교수 재임용 계약을 진행하면서 이 상황 또한 곧 끝날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컨설팅 펌에서 14년을 일하면서 인사시스템에 들어가면 계약 기간이 9999-12-31로 되어있었는데(정규직), 대학교로 온 이후로는 매년 연말 되면 다시 임용 서류를 준비해서 재계약을 해야 했다. 학교로 오게 된 이유는 교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과의 시간이 중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연봉의 1/3 정도밖에 받지 못하면서도 학교로 오게 되었다. 학교에서의 삶은 가족 중심이 되었고 아이들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산학교수 프로그램이 4년(기본)+2년이 최대였기 때문에 학교로 올 때부터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했다. 2016년 가을에 학교로 올 때 생각했던 미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그리고 이 때는 박사를 막 시작하면서 박사 이후에 시나리오도 같이 그렸었다.


미래 시나리오 설계


시나리오 1. Professor

1.1. OO대 교수로 계속해서 근무

1.2. 다른 대학 교수로 근무


시나리오 2. International Organization


시나리오 3. 해외 대학 또는 Think Tank.


시나리오 4. Private Sector


시나리오 5. Government / Public Sector


다양한 시나리오를 세우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미 산업계에서 충분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민간기업으로 충분히 갈 수도 있었고, 정부 프로젝트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이나 정부기관으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학계에 있다 보니 컨설팅 펌에서 고민했던 자유로움에 대한 것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학계에 있는 것이 좋을 듯했고, 와이프도 내가 시간적 여유가 많고 아이들과 함께 많이 시간을 보내주니 학계를 좋아했다. 물론 1년 수입도 학계로 온 지 2년 차부터는 외부 활동을 많이 하면서 컨설팅 펌에서 Senior Manager로 일할 때 받았던 수입보다도 더 많아지게 되었다. 몸이 바쁘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을 통제할 수 있었고, 수입도 더 많아졌기 때문에 꽤 여유롭고 좋았던 시기였다.




산학협력중점교수로서 3년간의 변화의 시기


학교로 산학협력중점교수로 와서 3년간 시간 동안 중간중간 당시의 상황들을 기록했었다.


2017.01. (+학계로 이직 후 4개월 지난 시점)

4개월이 지나고 나서 평가를 하자면, 생각했던 Time, Influence, Money 모두 긍정적이다. 글을 쓰는 현재 1/12일 일본 유후인 히노하루 료칸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데, 겨울방학이라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내 시간을 내가 활용하여 여유롭게 휴가를 와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컨설팅 펌에 있었다면 파트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꽤 신경 쓰일 일이 있었을 것이다.


2017.10. (+1년 1M)

지도 교수님이 외부로부터 큰 금액의 펀딩을 받을 예정이라 나보고 공동창업을 하자고 권유하셨고, 스타트업을 위해 다른 것들을 하나씩 줄이고 회사에 전념하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커리어에 있어서 최대의 난관과 고민 중이다. 나는 승승장구하던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학계로 온 것은 돈보다는 가족과의 시간과 나 스스로에 대한 미래를 위한 것이었는데, 아직 한참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은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하고, 학자로서의 진로를 포기해야 하는 큰 커리어에 있어서 고민거리였다.


2018.04. (+1년 8M)

작년 가을부터 있었던 지도 교수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갑작스러운 장인 어르신의 암 진단과, 가족과의 여행 일정으로 인해 스타트업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지분 인수금액 X천만 원의 부담도 컸고, 초기 시간 투자에 대한 부담도 컸고, 산학교수 재계약 금지를 주주 간 계약서에 넣는 것도 커서,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가족 건강 사유로 정말 어렵게 참여 안 하기로 말씀드렸다. 이후 지도 교수님이 내가 연구실에서 그나마 참여하고 있던 A 프로젝트에서 나를 제외시키고 학생들로만 구성했다. 조금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학계 쪽으로 조금 더 신경 쓰기로 하고 논문을 열심히 쓰는 중이다.

3월 중순에 학부 때 만난 형과 가상화폐 거래소 A 프로젝트를 하다가, 그 형이 B대학교에서 지도교수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어서, 나보고 지도교수 잘 만나야 한다면서, L 교수님으로 바꾸는 게 나한테 훨씬 좋겠다고 이야기를 며칠을 고민했다.

L교수님을 만났는데 지도교수는 그대로 K교수로 하고, K 교수와 이야기 나눠보라고 하셨다. 정책 쪽은 SCI급 논문보다는 쉽다고 하시면서도, 정책 관련 논문 쓰고 싶으면 같이 합류해도 좋다고. 그리고 L교수님 방에 있는 중에 대학원 원장님이 오셔서 내가 제안했던 프로젝트를 추진해보자고 하시면서, 내가 산학협력중점교수로 하고 있는 정부 지원 사업이 올해 마지막이라, 올해 말 나보고 잘린다고;;; 하셔서, 긴장하고 있다. 나중에 이런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충반한 경제적 기반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2018.06. (+1년 10개월)

예전부터 꿈꾸던 컨설팅, 강의, 집필하는 자유로운 삶을 어느 정도 살고 있는데, 약간의 답답함과 걱정이 들고 있다. 정부 프로젝트에서 급여가 지급되다 보니 매년 1월부터 4월까지는 급여가 공식적으로 없어서 첫 해는 당황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먼저 지급해주고 나중에 5월에 학교에 다시 돌려줬다. 이 시기에 아무런 수입이 없어도 3개월은 지낼 수 있는 경제적 에어백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아직은 좀 괜찮은 편이다.


올해 하반기, 내년 상반기에 신분이 어떻게 될지 불확실성이 아무래도 리스크를 더 높이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내년에 산학교수가 안되고 박사만 하게 된다면 겪게 될 1년의 시간. 그렇다고 다음 해 바로 교수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아마 최대 고민(?) 시기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다양한 백업플랜으로 O 법인을 만들고 D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다행인듯하다. 강의는 석탑강의상을 받은 만큼, 어서 논문도 잘 써서 졸업할 수 있는 요건을 빨리 만들어 놓는 것이 주요 관점이 될 거 같다. 너무 목매달지 않도록, 너무 끌려가지 않도록, 현명하게 준비해야겠다. 지금은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 만큼, 이것을 더 잘 유지하기 위한 책임도 따르는 법이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몇 년 전부터 꿈꿔왔던 강의, 집필, 컨설팅의 삶을 살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그런데 앞으로 5년 10년 뒤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경제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모습 정도의 추상적인데,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생각해봐야겠다.


2018년 8월 (+2년)

심적으로 꽤 불안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외부 일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과의 시간도 학교로 온 지 처음에 비해서 많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마음이 급하다 보니 와이프한테 더 다정다감하게 못해던 시기였다. 그래서 와이프한테 당시에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주요 내용은 2018년 8월부터 12월까지 약 4개월간 내가 벌려놓은 너무 많은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약간은 가족보다는 일처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통장의 현금 잔고도 줄어들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진 상태에서 4개월간은 여러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그래도 그에 대한 보상이 꽤 컸기 때문에 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양해를 구했다. 당시에 새벽에 나가서 매일같이 일을 하고, 주말도 일을 했는데, 한 달에 번 수입이 예전 첫 번째 직장에서 받았던 1년 연봉보다도 더 많은 수입이었다.


2019년 5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이번 대학 총장 선거에 우리 대학원이 밀었던 후보들이 모두 잘 안되어서 현재 총장한테 우리 대학원이 찍힌 상태라고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정부 과제도 대학 내부 경쟁에서 다른 단과대학에 밀렸다고 하면서, 대학교 내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심하게 갈등하고 있다고 들었다. A 단과대학이 계속 전임교원을 채용할 수 있고, 이제 현 총장 임기 4년 동안 우리 대학원은 신임 전임교원은 거의 없을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해서 괜스레 좀 심란해졌다 (이후에 이게 사실이 아니라 우리 대학원도 매년 신임교원을 뽑았었다).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서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항상 대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름이 낀 상태다 보니, 좀 더 마음이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정부 프로그램도 확실한 건 앞으로 3년 남았고,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만난 K 박사님도 박사 할 때는 진짜 학교생활이 힘들었는데, 국책연구소에 와서 일을 하다 보니, 역시 자유롭고 제일 좋은 환경은 학교 같다고 말씀하시고. 나도 경험해보니까 학교만큼 괜찮은 곳은 참 없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연구실적도 많이 잘 쌓아놓고, 모든 조건에서 학교를 뛰어넘는 실력과 명성을 쌓아서, 학교에서 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명성과 실적을 쌓아 놓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인 듯하다. 그리고 시나리오 2로, 보스턴을 가는 방향과, 시나리오 3으로 호주 쪽으로 가는 방향. 그전에 내년 9월에는 무조건 박사학위 얻는 것으로 엄청나게 집중해서 논문 실적을 만들어보자. 다행히 자산은 작년 하반기에 열심히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 덕분에 1년 정도 생활비는 만들었고, 5월부터 12월까지 예상 수입을 계산하면 올해 말이 되면 경제적으로는 2년 정도 생활비를 충분히 갖고 있을 수 있기에, 여유롭게 새로운 일을 찾아서 도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든다. 참 감사한 일이다.

스트레스는 적당히 받고 너무 심하게 받지 말고, 긍정적이고 현실적으로 잘 헤쳐나가 보도록 하자!!!


2019년 8월.

아들 어린이집에서 만나서 엄청나게 가까워지고 친해진 K 교수님이 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와이프도 교수는 상대적으로 스트레스 많이 받고 암에 걸리기 쉬운 직종이라는 말에 미래 커리어에 대한 걱정이 조금 더 생겼다. 그래서 나도 좀 더 가족에게 안심을 시켜주기 위한 무언가를 잘 준비해야겠다. 일단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고, 자리에 대해서도 연연해하지 않고 싶다. 경제적으로는 현재 1년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모아두었고, 목표는 연말까지 2년 정도의 생활 자금을 모아 놓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요즘 학계의 핫이슈 중 하나인 강사법 개정. 강사를 채용하면 최소 3년은 보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방학 때 급여를 줘야 한다는 것 때문에 8/1일 오늘 시행되는데 많은 학교에서 시간강사들이 자리를 얻지 못했다. 나는 내년 7월까지 산학교수로 있고, 올해 9월부터는 I단과대학 소속이 아니라 대학원 소속으로 재임용을 준비하고 있다. 정부 특성화 사업이 내년 말에 종료되는 지라, 현재 대학원 측에서 나를 좀 더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것과 별개로 졸업요건을 갖추어서 내년 하반기에 졸업을 하면서 운 좋으면 내년 하반기 또는 내후년 하반기에 전임교수로 부임하는 것도 좋고. 그게 아니면 또는 병행하여 미국에 있는 대학이나 연구소 쪽으로 진출해 보는 것도 백업 플랜으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 대한민국의 상황과, 국제 정세, 그리고 가족의 미래 등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나의 능력과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또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19년 11월.

몇 주전에 학교 원로 교수님이 연락 오셔서 내년에 졸업하시는지 여쭤보시면서, 우리 대학교 지방캠퍼스는 어떠냐고 여쭤보셨다. 감사하긴 하지만 이왕이면 서울캠이면 더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연히 본인도 서울캠이 되면 좋겠지만, 백업 플랜으로 지방캠퍼스를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최근에 계속 교수를 뽑고 잇으니, 내년 상반기에 지방 캠퍼스에 강의를 하나 부탁하신다고 하셨다. 아침에 와이프한테 이런저런 이야기 하니, 와이프도 본인 의사결정을 분명히 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본인은 지방 캠퍼스도 괜찮다고 했다. 호주 Q 대학, 미국 워싱턴/보스턴, 그리고 K대학교 지방 캠퍼스. 나에게 주어지는 옵션이다.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도 나의 노력과 인생의 방향에 달려있는 것 같다.




UN으로부터의 초대: 글로벌 무대로의 첫 진출과 가문의 영광


꽤 오래전부터 UN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비출 수 있는 곳. 내 시야에는 UN이었다. 그것을 위해 국가 공무원 등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을 마다하고, 계속적인 변화를 주면서 국제 활동을 위한 글로벌 컨설팅 펌 경험 등을 쌓아 나갔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UN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에, 소개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소개를 해줬다. 그리고 내가 글로벌로 진출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프로파일을 UN 관계자에게 보내줬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회신이 왔다. 전문가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나에게 한 세션을 맡아서 강의해줄 수 없냐고 한 것이었다. 정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완벽한 영어도 아니고, 아직도 많이 미숙한 영어지만, 그냥 도전해보고 경험해 본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꽤 큰 부담감이 있지만, 부담감을 가지고 준비해야지 느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모든 체류 비용을 지원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UNODC will purchase a round trip air ticket in economy class to Tashkent, Uzbekistan, and daily subsistence allowance, at the official UN rate for Tashkent to cover the costs of hotel accommodation, meals and terminal expenses."


매우 타이트한 일정이었지만, 당연히 수락을 했다.


"Thank you very much for accepting our invitation in spite of your very busy schedule."


그리고 mock lecture를 알아보면서 내가 대학교에서 강의한 자료를 영어로 바꿔서 70여분 발표를 준비할 내용으로 보냈다. UN으로부터 Bank Account를 알려달라는 공식 메일도 받고, 어레인지 해주시는 담당자로부터 Programme Officer가 보낸 초대장에 모든 것은 UN이 제공해 준다는 메일을 받았다.


최종적인 스케줄과 참석자들 명단을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나 혼자. Cybersecurity 강의를 30명이 넘는 유럽, 중앙아시아 lecture, professor 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시간. 정말 감사하고 기대되고 설레고 부담은 많았다. 2000년부터 언더 해커 활동과, 2003년부터 시작한 회사생활, 그리고 여러 번 이직하면서 글로벌로 향하기 위한 활동과 노력들을 바탕으로 이렇게 기회가 오게 되는 것이 너무 감격스럽다. 7월 5일 International Governance Forum (IGF) 토론을 주관하는 것과 7월 9일부터 2주간 힘든 강의 준비하는 것 등 동시에 중요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받긴 하지만,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에 너무 명예롭고 감사한 일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