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해
2016년 산업계에서 학계로 옮기면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까를 많이 고민했다. 최고의 명품 강의를 만들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고, 교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매 수업 강의를 내가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학교로 온 덕분에 일주일에 화요일 2시간, 목요일 1시간 강의를 배정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와이프와 시간을 보내거나, 부모님을 뵈러 원주로 종종 내려갔다. 그래서 회사에 있을 때보다는 부모님을 더 자주 뵐 수 있었다. 2학기에 대학교에서 존경하는 교수님이 학교에 있는 동안 박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해주셨다. 내가 석사를 한 이유는 나중에 국제기구에 갈 때 최소한의 요건이기 때문에 석사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박사는 딱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박사를 해 놓고 나중에 전임교수와 같은 길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성향은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연구실에 박혀서 연구만 하는 성향보다는 사람들과 부딧기면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받으면서 뭔가 빠르게 기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연구실에서 연구하는 것, 그리고 논문 쓰는 것은 내 성향과는 많이 달라서 좀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에 박사 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2016년 하반기에 지원을 했고 수험번호 2번으로 면접을 보고 박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2017년에는 학교에서 학부생과, 대학원 생을 가르치면서, 나도 박사 수업을 들었다.
부모님 뵈러 원주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점점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원주 오셨을 때는 식사도 곧잘 드시고 하셨는데, 점점 힘이 없으시고 누워있는 시간이 많으셨다. 그래도 누나가 항상 함께 옆에 있어주고, 잘 챙겨주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1월 설날 아침에 어머니는 더 이상 아픔도 고통도 없는 곳으로 가셨다. 내가 브런치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 어버이날, 부모님을 생각하며, 그리며 브런치에 글을 썼다. 그리고 부모님의 은혜와 감사함을 위해 내가 살아온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으면서 글을 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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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3개월 정도는 온전히 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두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는 와이프를 혼자 두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이제 막 학교로 옮겼기 때문에 학생들 가르치는 것과, 강의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생각한 대로 아주 자주 들리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도 거실 이동식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어머니가 희미하게 나를 부르셨을 때,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으셨었다. 나는 어머니가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자리를 바꿔드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다음 학기 강의 자료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아직 몸은 현실에 붙들려 있기에.
그렇게 어릴 때부터 푸근하게 기댈 수 있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셨던 어머니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무하고 허망했다. 병원에서 소생술이 더 이상 안되어서 옆에 자그마한 방에서 떠나보낼 시간을 주는데 그 안에서 정말 많이 울었다. 당시 아버지께는 바로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이후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안 데리고 갔다고 참으로 많이 원망하셨다. 너무 죄송했고 마음이 아팠고 슬펐다.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라 생각은 했지만 현실에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붕 뜨고 심적으로 꽤 많은 방황을 했다.
그리고 마음의 방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점점 나를 수렁으로 끌고 갔다. 이제 3살과 아직 돌도 안된 둘째를 돌보는 와이프도 힘들었지만, 그런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책임지어야 하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마음의 방황은 커지고, 점점 밝은 빛이 아닌 어둠으로 향해 갔다.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예전 부산에서 와이프와 아주 가까운 분이 손금을 봐주신 적이 있으셨다. 그때 손금을 보시더니, 내 앞길에 많은 장애물들을 누가 치워주고 있는 운이라고 하셨다. 나는 정말 소름이 돋았었다. 매일 어머니는 마당에 나가 물을 떠놓으시고 가족들 잘되라고, 아들 잘 되라고 늘 기도하셨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실력보다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많은 좋은 일들이 운명처럼, 좋은 인연들과 좋은 기회들을 만나서 점점 잘 풀려가고 있었다. 나보다 더 실력 좋고 능력 있는 사람들도 잘못된 인연들과 운이 안 좋아서 안 풀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나의 경우는 참 감사한 일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운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 크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앞에 이어져 있던 길이 끊어지고 심연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2017년 한 해는 슬픈 헤어짐과 방황으로 내 인생의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