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석유부국으로 갑작스러운 이동
아마, 이 글이 40여 년 여정 커리어의 변화의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이 매거진의 마지막 글이다 보니 쓰다 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
처음에 브런치에 글 쓸 때는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줄을 몰랐다. 어버이날을 기해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글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하소연하듯이 기록을 남겨놓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과거 삶에 대해 언젠간 기록을 하고 싶어서 브런치에 몇 편의 글을 남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글에 라이킷이 달리는 것을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좀 부끄러운 나의 과거 이야기이고, 또한 나를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받고 싶어 하는 기분도 들었고, 어머니가 계실 때는 늘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었는데, 내 글에 라이킷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나 보다. 감사하게도 매번 글 쓸 때마다 라이킷 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다른 해야 할 일들도 많지만 시간을 쪼개서, 어쩜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준 @조매영, @초원의 빛, @김승일, @가나림, @문장가, @임세규, @톨슈, @사노니, @엄혜령의 캘리그라피, @샛별, @추세경, 그리고 그 외 관심 가져주신 작가분들께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투버들이 왜 좋아요와 구독에 열광하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아버지와의 이별
2019년 봄에 노인정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길에서 넘어지시면서 다리뼈를 다치셨고, 이후에 입원을 하셨다. 거동이 불편하시니 누가 옆에서 상시 있어야 하는데 가족 모두 그럴 형편이 안되어서, 보호사를 24시간 붙였다. 연세가 많으시다 보니 뼈가 다시 붙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약 3달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야 퇴원을 하실 수 있으셨다. 누나한테는 내가 병원비와 보호사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당뇨약과 혈압약 등 약을 평생 안고 사셨고, 10대 때는 부모님이 병원비가 없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약만 타서 드셨던 것이 기억났고, 병원비 때문에, 돈 때문에 내가 어릴 적 다투시던 모습이 많이 생각났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버지라도 돈 걱정 없이 치료받게 하고 싶었다. 수술비와 간병비 등 약 3-4개월 동안 수천만 원이 나갔지만, 내가 반 이상을 보태고 누나들이 돈을 합쳐서 보탰다. 다행히 회복하시고 퇴원하셨다. 그러다가 몇 달 뒤에 갑자기 심장질환으로 쓰러지셔서 급히 심혈관 스텐스 시술을 하셨고, 그 이후로는 예전처럼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여름, 가을 내내 병원에서 지내시다가, 응급 상황을 몇 번 왔다 갔다 한 이후에 가톨릭 요양원으로 모셨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2019년 가을에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눈을 감으셨다.
극적으로 졸업 요건 달성
2020년, 지금까지 이야기의 종결이 되는 해이다. 박사 만 3년이 되었고 SCIE 논문 한편이 있는 상황에서, 한편 더 억셉되면 졸업을 할 수 있는 학과 기준에 따라서 열심히 논문을 썼다. 방학기간 동안 열심히 해서 2월 2일에 한편을 투고했지만, 보통 4월쯤에 졸업 신청을 받기 때문에 올해 상반기는 졸업이 어려워 보였다. 운 좋게도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인 한 달 반만인 3월 24일 날 Major Revision을 받았다. 원래 상반기에는 지방에 있는 캠퍼스에 한 과목을 맡아서 강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모든 과목이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오후까지 집에서 내내 논문에 몰입했고, 3과목 강의도 최고의 퀄리티를 위해 매주 녹화 강의를 열심히 했다. 다행스럽게 4월 초에 바로 수정 논문을 투고했고 5월 6일 날 억셉 메일을 받았다. 그리고 박사 최종 심사 신청이 코로나로 인해 5월 중순으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시기에 운 좋게 박사 최종 심사 전에 모든 요건을 달성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다음 학기에 졸업을 준비하자고 하시면서 이번 학기에는 적극적이지 않으셨다. 왠지 나는 이번 학기에 졸업을 하고 싶었다. 작년에도 호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자리가 나서 오퍼가 왔지만 박사학위가 없어서 지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치를 살피다가 2편이 되고 나서 일주일쯤 지났는데, 먼저 교수님이 지금까지 실적을 달라고 해서 내가 모은 실적들을 보내드렸더니 그럼 이번 학기에 졸업을 해보자고 하셨다!
박사 디펜스 성공
해외 SCIE 저널 2편이 있었고, 해외 컨퍼런스 1편이 있었지만 박사논문은 또 다른 문제였다. 150페이지 분량으로 영어 논문을 정리해야 하는 거였다. 여러 번의 퇴짜를 맞고 겨우 발표 날 마감 이틀 전에 마무리해서 발표를 마쳤다. 총 5분의 교수님들이 들어오셨고 다행히 몇 가지 소소한 코멘트를 주시고는 통과가 되었다. 이제 박사 학위를 받고 나니, 보다 더 자유로워졌다. 그동안의 지도교수님의 통제 아닌 통제와 굴레에 있다 보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제 앞으로 나의 미래와 우리 가족의 미래는 온전히 내가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이 드니, 더욱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가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포닥?
박사학위를 마치니 원장님이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여쭤보셨다. 나는 여러 가지 미래 시나리오를 말씀드렸다.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미국 동부 보스턴/뉴욕/워싱턴 쪽이었다. 뉴욕/보스턴에는 친한 형이 있었고, 워싱턴 쪽에서도 D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던 분이 미국 정부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 쪽도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같이 일했던 형이 계셔서 독일/스위스 쪽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작년에 불발되었지만 호주 쪽도 언급했다. 주로 해외를 말씀드렸더니, 포닥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씀해주셨다. 이때까지는 포닥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민간 분야에서 14년 정도 일을 했었고, 이제 박사학위를 갖긴 했지만, 학교 산학교수로 4년 정도 강의했었는데, 역시 원로 교수님들이 보시기에 미국 포닥은 갖고 있는데 국내 괜찮은 대학에 자리 잡기가 유리해 보인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아직 학교 계약은 남아있었고, 감사하게도 잔고도 조금 여유로웠기 때문에 수입 없이도 포닥을 1년 이상 가족과 함께 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포닥 이후에 여전히 고민이 있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참에 6월 말에 원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기서부터는 좀 드라마틱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밀하게 기록했던 내용을 적는다.
해외대학 지원
대학원 박사 심사를 통과하고 서명을 받기 위해 대학원장님과 통화하다가, 원장님이 갑자기 "김 교수, OOO 대학에 관심 있어요?" 하셨다. 내가 "네? OOO요?"라고 하니, "OOO 대학에서 한국인 교수를 뽑는데 김 교수가 잘 맞을 것 같아서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 네.. 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와이프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의외로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우리는 같이 인터넷에서 OOO 대학을 폭풍 검색했다.
다음날까지 와이프와 중동에 있는 OOO 대학과 중동 생활, 해당 국가에 대해 폭풍 검색하고, 유튜브와 많은 자료를 찾아보니, 해당 국가에서는 A대학이 가장 많이 검색되었고 근무 환경이나 생활환경은 꽤 엄청 좋아 보였다. 그래서 와이프와 이야기 나눈 끝에 원장님께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달라고 해보자고 했다.
대학 원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가족과 상의해 봤는데 괜찮을 것 같아서 한번 구체적인 대학교 정보를 소개해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더니, 인터폴에서 일하는 지인이 소개해준 거라고 하시면서, 그쪽에서 연락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카톡방이 만들어졌다. 두 분이 들어오셨는데 잘 아는 분들이었다. 두 분 중 인터폴에서 근무하는 지인이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자를 찾는 대학은 N 대학이라고 했다.
K 대학이 아니라 N 대학요?
인터폴에 있는 지인은 과하게 나를 인정해주면서 김 교수님 같은 분이면 한국을 대표하시기에 최고라고 치켜세워줬다. 뻘쭘. N 대학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셨다. 수도에 있는 대학이라고 하시고, 장차 중동의 허브 대학으로 키우려고 한다고 했다. 이미 인도와 호주에서 교수를 구했고, 미국에서도 2주에 한 번씩 비행기 타고 와서 강의한다고 했다. 다양성을 위해 꼭 한국에서도 한 명 모시고 싶다고 배경을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아직까지도 해당 국가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다. 술을 좋아하시면 심심할 수도 있는 나라이지만, 중동 부자 국가답게 의료나 교육 등은 잘 갖춰져 있다고 했다.
와이프도 아이들이 이제 곧 학교에 갈 나이 때라, 그렇지 않아도 잠시 1년 정도 해외로 나갈까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아서 진행해보겠다고 했다. 다행히도 미리 준비해둔 영문 이력서가 있어서 바로 전달드렸다. 이력서를 보시더니, 그쪽에서 엄청 좋아할 것 같다고 바로 추천 이메일을 쓰겠다고 하셨다. 이력서는 총 18페이지로 되어있는데, 미국에 있는 교수를 벤치마킹해서 향후 교수 임용 때 준비하려고 미리 영어로 준비했던 거였다.
학교 이름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정보가 많지는 않았다. 영문으로 찾아보니 정보가 조금 나왔다. 한 국가에만 소속된 대학이 아니라 아랍연맹에서 만든 대학교. 이때까지만 해도 참 생소했다. 반나절 뒤에 그쪽에서 이력서를 보더니, 조건을 수용해 주겠다고 바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왓츠앱을 쓰냐고 물어봤다. 허걱, 바로;; 그래서 일단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 내일쯤 통화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번개 같은 학과장 인터뷰. 그리고 바로 1주일 만에 최고위직 인터뷰 일정 확정
다음날 바로 톡이 왔다. 인터폴에 있는 지인 말로는 학과장이 엄청 열심히 물어본다고. 당장 2시간 뒤에 전화하겠다고 했단다. 그 시간이 그 나라 시간으로는 새벽 2시 50분인데. 참고로 이제 해당 국가를 아주 약간씩 알아가고 있는 과정이다. 해당 국가는 한국은 시차가 6시간이 난다. 한국이 오전 9시면, 그 나라는 새벽 3시.
오후에 통화하자고 말하고, 그 학과장도 이제 잠이 들었겠지 하면서 오후 면접을 기다렸다. 나도 학과장이 누군지 궁금하고, 미리 좀 알면 그래도 대응(?) 하는 게 좀 편할 것 같아서 이름을 여쭤봤다. 이름으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3명 정도가 나오길래 물어봤더니, 제일 귀엽게 생긴 분이라고 했다. 알아보니, 런던 로열 홀로웨이에서 석사 하고, 영국에서 박사까지 한 뒤, K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던 분이었다.
나는 국내 K대에서 다음 학기에도, 그리고 내년 1학기에도 강의가 예정되어 있어서 잘된다고 해도 연말 지나고 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예정된 인터뷰 시작 시간보다 1시간이 일찍 왓츠앱으로 연락 와서 지금 이야기 가능하냐고 물어보길래, 가능하다고 하니. 스카이프로 통화하자고 했다. 약 40분 정도 전화통화로 면접을 보고, 면접 끝날 때쯤에 얼마를 받고 싶냐고 물어보길래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좀 당황해서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이때 옆에 있던 와이프는 내 영어 인터뷰를 보더니 좌절했다고 이후에 이야기를 들었다 ;;;
잠시 후에 왓츠앱으로 연락이 왔다. 텍스트가 아니라 음성 녹음으로 왔다. 다음 주에 Senior Management와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가능한 날 2개를 달라고 했다. 다음 주에 화~목은 국방부 강의가 하루 종일 있어서 월요일과 금요일 가능하다고 했더니, 월요일 오후에 Senior Management와 인터뷰를 하자고 하면서, 학교 홈페이지에 있는 비전과 목표 등 내용을 꼭꼭 읽어보라고, 매우 높은 분이라고 신신당부를 나한테 했다.
협상 결렬. 조건이 맞지 않아서 가지 않기로 결정.
Senior Management 인터뷰 Invitation 일정을 받았다. 잠시 후에 학과장이 연락 와서 잠시 스카이프로 통화하자고 했다. 그러더니, 내일 갑자기 테크니컬 면접을 추가로 보잔다. 이번에 채용된 호주 교수인데, peer interview를 진행하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전에 와이프와 삼청동 커피숍에 가서 애들 교육비, 거주비, 급여 등에 대한 조건을 같이 논의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조건을 학과장에게 제시했다. 교육은 국제학교에 보내기 위한 금액과, 거주비는 외국인 거주지역 비용, 그리고 연봉을 말했다. 참고로 해당 국가는 치안은 꽤 괜찮은 편인데, 종교 문화가 보수적인 나라라서 여자분들이 혼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조건을 제시한 것에서 자녀들 학비 지원이 안된다고 한다. 헉. 분명 7월 초에 카톡으로 초기 의사 전달할 때 지원된다고 들었는데, 물어보니 학교에서는 그런 규정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주택 지원도 학교 내에 있는 숙소를 제공해준다고 하고, 그게 아니면 일정 금액을 제공해주는데, 그 금액으로는 내가 생각했던 거주지는 택도 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의료보험은 VIP, 그리고 가족 4인 모두 왕복 항공권 1년에 한 번씩 제공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교육비 지원이 안되고, 내가 생각한 주거 비용도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조건과 그쪽에서 제공하는 조건의 갭이 커서 솔직히 말해서, 조건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학과장이 매우 적극적으로 붙잡았다. 숙소도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곳이 있고, 자녀들 학교도 국제학교 아니라도 좋은 곳이 많다고 본인도 신경 써주겠다고 하고, 그리고 연봉도 좀 더 올려줄 수 있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런다고 해도 한국에서 내가 벌고 있는 수입에 비해, 학교 비용, 거주비 등을 빼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아서, 더 이상 인터뷰는 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더 좋은 사람을 뽑길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재협상과 최고위직 면접 보기로 결정
새벽까지 와츠앱으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더 좋은 사람 구해라고 말했더니 학과장은 나보고 매우 가족을 신경 쓰는 좋은 사람이라면서 연봉을 더 높이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연봉 올려서 초기 조건을 만족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최종 면접 통과하기까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럼 내일 있을 Senior Management 인터뷰는 안 볼 것이냐고 물어보길래. 학과장의 입장을 고려해서 당장 내일 인터뷰인데 안 본다고 하면 학과장 체면도 좀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내일 Senior Management 인터뷰는 본다고 했다.
저녁에 호주에 있는 교수랑 Technical Interview를 진행했다. 학과장 면접보다는 좀 더 기술적으로 예리하고, 케이스도 물어보고 조금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본 것 같다. 학과장이 다시 연락 와서 기술 면접 어땠냐고 물어보면서, 다시 학교의 비전을 강조하고, Diversity를 강조하고, 그리고 본인이 Salary를 최대한 올리도록 위에다가 이야기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학교 홈페이지 가서 학교의 Vision과 Mission 등을 살펴봤다. 학교를 검색하다 보니, UN 마약범죄 사무소(UNODC) 홈페이지에 공식적인 네트워크 기관 중 하나로 이 학교가 선정되어 있었다. 신기했다. 내가 작년에 지인 추천으로 타슈켄트에 있는 UN 마약범죄 사무소에 가서 특강을 하고 왔는데, N 대학교가 UNODC와 관계가 있다니. 그리고 홈페이지는 당연히 아랍어로 되어있어서 영어 버전으로 살펴보고 학교에 대해 이해를 했다. 학교가 일반적인 대학교와 다르게 뭔가 regional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고, 아랍 리그, 내무부 협의회 등 뭔가 국가 기관에서 진행하는 행사들을 많이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조건이 맞지 않았기에 가지 않을 마음으로 편안하게 내일 면접을 준비했다.
학교의 비전인가, 국가의 비전인가
다음날 가지 않을 마음으로 편안히, 차분이 인터뷰에 들어갔다. 학과장이 Senior Management에게 나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었고, Teams으로 들어갔더니 2 분이 화상으로 등장하셨다. 한분은 뒤에 해당 국가 국기가 있는 방에 계신 나이 지긋한 분이었고, 한 분은 좀 젊어 보이는 분이었는데 뒤에 액자에 사람 사진이 3개 걸려있었다.
내 이력서를 보시면서 석탑강의상 받은 것들, 산학교수, Offensive Cybersecurity, Smart City 보안 등등 많은 것들을 여쭤보셨다. 안 갈 것이라고 마음먹고 면접을 봤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Full 정장을 차려입고 면접을 봤다. 그리고 답변도 최대한 상세히 차분이 답변드렸다. 뭔가 나이 많으신 분이 오히려 나이 젊으신 분에게 예우를 갖추는 것을 보고 좀 의아스러웠다. 마지막에 젊으신 분이 질문이 없냐고 물어보시길래, 없다고 하면 좀 그럴 것 같아서 순간 학교의 비전이 어떤지 물어봤다. 주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작년에 UNODC에 초대로 다녀왔는데, UNODC 홈페이지에 네트워크 기관으로 N 대학이 있다는 것 정도를 봤다고 말했다.
젊어 보이시는 분이, 학교에 설립 역사와, 인터폴, UNODC 뿐만 아니라 UN의 많은 기관들과 깊이 교류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점점 학교의 비전을 넘어서 국가의 비전을 설명해주시길래 적잖게 놀랬다. 설명을 매우 길고 상세하게 잘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고, 정말로 학교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UN과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긴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한국 시간으로 밤이 늦어서 잠을 잤는데, 인터뷰 끝나고 한 시간 뒤에 학과장한테서 전화가 온 것을 받지 못했다.
이틀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최종 면접 때 나한테 질문하고, 내 질문에 길게 답변해주신 젊은 분이, 우리 학교 Supreme Council President이시면서, 내무부 장관이시면서, 왕족이신거 같았다.
N 대학교와 계약
7월 7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서 대전으로 강의를 하러 갔다. 계속 WhatsApp으로 연락이 왔는데. Senior Management가 내 인터뷰가 마음에 들었는지,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줬다고, 내가 원하는 조건을 하나씩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자녀들 학비는 내가 오퍼 한 연봉보다 더 많이 올려주면 그 차액으로 자녀들 학비를 보내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오른 게 충분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했고, 숙소, 의료 보험, 기타 내가 해야 할 파트 강의와, Center of Excellent에서 4개의 labs을 만드는데, 나보고 하나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쯤 비서가 오피셜 계약서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7월 7일 늦은 오후에 N대학교에서 계약서가 왔다. 와이프와 같이 살펴보는데, 조건이 괜찮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해당 국가에는 소득세가 없다. 적절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는 금액과, 자녀들 국제학교 보내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지내고, 그리고 하는 일도 인터폴, UN 등과 일을 많이 하고 있어서 도전적이고 재미있어 보였다. 그래서 계약을 하겠다고 하고, 7월 7일 화요일, 정확히 이력서를 주고 난 후 7일 만에 계약서까지 사인하게 되었다. 뭔가 정신없이 이뤄지긴 했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
계약을 하고 나서는 약 3개월간 코로나로 인해 국제선이 막혀있었고, 비자 문제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가족 모두 비자를 받고 함께 출국할 수 있었다.
2020년 10월 3일. 오후 12시 10분
따뜻한 배려의 좋은 첫인상.
약 15시간을 비행해서 중동으로 날아갔다. 공항에 도착하니 기내에 붙인 짐을 찾는 곳에 이미 학교 관계자 두 분이 나와계셨다. 그리고 무거운 짐 20kg 8개를 공항 직원분이 모두 내려주고, 밖에 대기한 차량에 모두 실어주셨다 (이때 까지만 해도 그냥 일반 차량인 줄 알았다. 이후에 알았는데 외교차량 2대였다). 학교에서 준비한 차량을 타고 학교 내 숙소에 잘 도착했다. 숙소는 계약 시 2 베드룸이라고 했는데, 가보니 학교 내 호텔 스위트룸(침실 1개 거실 1개) 3개 중에서 마음에 드는 2개를 고르란다. 한 집에 두방이 아니라 1 베드인 호텔 방을 2개 주는 거네. 그래도 우리 가족 4명이 지내기엔 충분했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온 168킬로의 짐들이 무색했지만. 그리고 식사도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제공해준다고 하고, 오후 2시쯤 학교 레스토랑에 가니 안쪽에 분위기 좋은 곳에 우리 가족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학교에서 너무 세심한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와이프도 어쩔 줄 몰라할 정도로 고마웠다.
이후 나만의 오피스가 생겼고, 산학교수일 때는 내 오피스가 없어서 매번 도서관에 있는 외부강사 대기실에서 강의 준비를 했었던 약간의 서러움이 있었는데, 내가 관리하는 랩이 생겼고, 단순히 일반 대학교처럼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닌 UN, 인터폴, ITU 등 국제기구랑 매우 밀접하게 일을 하는 곳이었다. 실제 조직의 형태도 정부 간 국제기구였다.
2006년부터 꿈꿔왔던 당시에는 학사도 졸업 못한 상태였지만, UN은 아직 아니지만, UN과 비슷한 정부 간 국제기구이면서 대학교에서 Assistant Professor로 일을 하게 되었다. 이후 학교에서 nominated 되어서 150개국 이상이 참가하는 UNODC 국제회의에 정부 간 전문가 그룹에 대학교에서 3명이 대표로 참가하는데 그중에 한 명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리고 ITU, INTERPOL, UNODC, ICANN 등과 같은 국제기구 전문가들과 매달 한번 이상을 컨퍼런스 미팅을 하면서 내 전문 분야를 함께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14년 전부터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이, 거의 대부분 현실로 이뤄진 것에 너무 감사한 일이다.
20살 때는 차비도 없어서 세 정거장을 걸어 다녔었고, 21살 때는 4개월을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일하고도 100만 원도 못 받고 월급 체불에 이상한 배달일 하다가 그만두고 학교로 오게 되었다. 20대 초반 연말연시에 모두 시내에서 술파티를 열고 축하를 할 때 맥주집에서 서빙하고 테이블 닦으면서 새해를 맞이하고, 23살 때 운 좋게 제대로 된 첫 회사를 다녔다. 그리고 이후로 7년간은 로컬 컨설팅회사에서 보안전문가로, 이후 7년은 P사와 D사와 같은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컨설턴트로, 그리고 7년은 멘토와, 교육가와, 산학교수로.
살던 곳도 20대 초반에는 단칸방과 고시원을 거쳐서, 신혼집도 빚 없이 지내자고 13평의 투룸 빌라에서 살았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거실에 넘치는 곳에서. 지금은 2층 저택에 개인 수영장까지 있는 집에서 지내고 있다. 오랜 시간이었지만, 한걸음 한걸음, 주변에 감사한 분들 덕분에 이렇게 올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늘 감사해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더 베풀면서 지내는 삶을 살려고 노력 중이다.
Ending...
지금까지 40년 간의 제 인생 커리어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에세이 형식으로 외부에 길게 글을 쓰는 것은 처음이다 보니 미숙한 점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20대 중반부터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엄청나게 많았던 사람으로서,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가족을 위해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여러 번의 커리어를 바꿔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 글을 읽는 현재의 커리어에 고민하는 분들도 현재의 모습으로 미래의 모습을 결정짓지 마시고, 인생에서 최고의 미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꿈을 위해 천천히라도 한 발짝씩 내 딧다보면 언젠간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40이 갓 넘은 상태에서 20대 중반에 꿈꿔왔던 모든 것을 사실 상 이뤘기 때문에, 이제 또 다른 여정을 위해 꿈을 꾸려고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현재 어떤 모습이시던지, 자신을 사랑하시고, 주변을 사랑하면서, 최고의 인생을 위해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