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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Braun Mar 27. 2022

붉은 여왕의 가설과 목표 설정

(feat. 따뜻해 보이는 생각의 오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래된 '붉은 여왕의 가설'은 듣기만 해도 한숨이 쉬어지는 종류의 이야기이다. 거울 나라는 한 사물이 움직이면 다른 사물도 그만큼의 속도로 따라 움직이는 특이한 나라다. 따라서 제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변의 환경보다 2배는 빠른 속도로 행동해야만 한다. 듣기만 해도 경쟁이 떠오르고 평생 뼈 빠지게 노력만 하다가 생을 마감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다. 수다 주제로 던지기에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 버릴 수 있다는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주제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가설을 글감으로 끌어온 이유는 뭘까? '환경은 꼭 변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고민에 대해 정리 해두기 위해서이다.



 환경이 변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두가지 양상을 보인다. 더 좋아지거나 혹은 더 나빠지거나.

 환경의 변화는 너무나 직설적으로 현실의 모습을 반영한다. 아주 세속적인 예시가 있다. A라는 사람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B라는 동네로 이사했다. 질문이라는 이름의 공을 신나게 주고받는다. '전세래 매매래?', '우와, 뭐 주식했대? 아 혹시 코인인가?', '아 연봉이 높대?', '임원이래?', '아, 스톡옵션 받았대?', '거긴 좀 근데 너무 신생회사 아닌가? 좀 불안하지 않을까?', '뭐 하긴. 리스크가 없으면 큰돈 벌기 어렵지', '어찌 됐든 잘됬네~', '아 근데 요즘은 오히려 집값이 떨어지는 추세는 아닌가?', '아 뭐 괜찮겠지. 근데 좀 불안하긴 하겠다.' 숨 막히게 진행되는 질문의 테니스는 어느 한쪽의 체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된다.

 정반대의 경우는 오히려 조금 조심스럽다. A가 B에 살다가 그보다 못한 것 같은 C로 이사했을 경우이다. '아, 속상하겠다.', '직장에서 잘 안됐대?',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어서 리스크가 크면 참 힘들 것 같더라.', '애들 학교도 옮겨야겠네?' '근데 C동네도 나쁘지 않다고 들었어. 나름 괜찮아.'

 여기까지는 꽤 뻔하다. 너무나 자주 실생활에서 보고 듣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질문은 세 번째 상황에 있다. 환경이 변하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에 대해서 '너는 10년째 변화가 없이 그 꼴로 사는구나?'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선전포고로 보면 된다. 그러면 변화가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삶이라는 경험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난이도를 크게 인지한다. 주변에는 생각보다 높은 확률로 잘살다가 망한 집 이야기가 떠돌고 또 그 반대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오히려 10년이고 20년이고 비슷한 환경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귀하다. 통계적으로는 사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높낮이가 드라마틱한 변화들이 가십거리가 되기 좋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삶에 대해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무감각하기 때문에 그 수가 더 적어 보이는 왜곡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비슷한 환경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실을 들을 때면 묘한 안도감과 존경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목표해야 하는 삶은 화려하게 성공한 삶보다는 일정한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변하지 않는 내 삶을 스스로 위로한다. 휴머니즘이 느껴지고 확실히 붉은 여왕의 가설과는 차원이 다른 따뜻함이 있다. 다만 이게 과연 옳은 행동일까?



 오랜 시간 같아 보이는 환경을 유지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목표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 목표가 '현상 유지' 일까? 물론 '현상 유지'를 그 대답으로 내놓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 사람들은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환경이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환경은 그 자체가 유기적으로 변화한다. 나는 매일 같은 삶을 살아가려고 해도 전화기는 핸드폰이 되고 핸드폰은 스마트폰으로 진화한다. 스마트폰이 새로운 세대의 강자로 등극하면 결국 나는 스마트폰을 써야 한다. 세상은 핸드폰의 변화처럼 간단하지 않다. 아주 관계없어 보이는 환경이 변해도 3년 뒤 그 변화로 인해 내가 딛고 있는 환경에 송두리째 바뀐다. 그 변화는 좋거나 나쁘거나 일 가능성이 99% 이상이다. 1% 가능성으로 내 주변 환경이 변하지 않았다면 역설적이지만 확률적으로 운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물론 더 좋게 되는 변화가 가장 운이 좋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확률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더 희소하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농담처럼 듣는 말 중에 '강남? 거기 아무것도 없었어. 그때 내가 땅 좀 샀으면 지금 부자일 텐데'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환경 그 자체가 변화하려는 60년대 그 시절 강남, 그곳이 내가 속한 환경이었다면 좋거나 나쁘거나 큰 기회가 있었겠다 싶다. 다만 잘 알지도 못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나를 둬서 얻은 이익이 있다면 그 이후에 있었을 비슷한 환경의 변화 상황에서 다 잃고 땅을 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결국  좋은 환경에 살거나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환경을 유지하는 것은  목표가 본질적으로 같아야 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좋게  좋은 환경에 살게  경우는  높은 확률로 미래에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환경의 변화를 내가 읽고 그것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곳에 있다 보니  환경을 통해 이득을 보는 것은 환경에 의해 나쁜 결과를 받아 드는 사람의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좋은 성공이 나에게  능력에 대한 근자감을 선물할  시작된다. 내가 탁월한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환경 따위는 더더욱 고려하지 않는다. 비논리로 무장하고 거만해지다 보면 언젠가 있을  변화에서 그나마 있던 조차 잃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뺏길 그날이 오면 익숙해져버린 좋은 환경을 쉽게 놓지 못하고 쓰러져서는 다시는 일어나질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실은 거울 나라처럼 내가 움직인다고 환경이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이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나와는 개별로 존재하는 환경이라는 객체는 심지어 복잡하기까지 하다. 쉽게 파악할 수도 없고 파악을 했다고 생각해서 속단하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쳐버리는 까다로운 존재다. 그래서 그 환경을 파악하는 것만 해도 평생이 걸리는 것이고 결국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평생 환경에 대해 인지하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거기다 어설피 환경을 이해하겠다고 접근하면 그 방대한 양을 다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번번이 나쁜 선택만 하며 인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아직 진정한 성공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나는 가끔 성공한 사람들의 비법과 관련된 서적이나 동영상을 본다. 딱히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약간의 취미생활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까지 시간낭비는 아닌 것 같다.

 접한 내용 중 조금 생각해 볼 만한 공통된 의견이 있다. 그것은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 같이 환경을 읽고 있다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루틴을 강조하고 매일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해왔다는 의견이 다수이다. 매일 겸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다 보니 지금의 내가 있었다는 아주 교과서 같은 말이다. 그런데 환경의 본질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이해할 수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결국 반 발짝 빠르게 변화를 인지하고 그 변화에서 나의 포지션을 취할 수 있는 힘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배 더 열심히 움직이라는 말은 진부하다. 그러나 적당히 현상 유지를 하자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진부한 것은 기분의 문제지만 위험한 것은 현실이다. 위험한 생각을 휴머니즘으로 퉁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조금 진부하더라도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인지하고 할 수 있는 것을 더 열심히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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