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폐급 장교후보생
[EP1. 폐급 장교후보생]
나는 매년 나만의 방식으로 유언을 쓴다.
죽을 생각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에, 너무 먼 것으로 생각하면 지혜롭게 죽음을 대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쓴다. 그리고 1년 치의 일기를 갱신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해를 돌아보며, 다가오는 한 해를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유언장은 조금 특별하다. 정식 유언의 느낌이라기보다, 나만의 형식으로 내 이야기를 누군가 기억해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작성되어 있다. 몇 가지의 항목 중, “살면서 후회하는 일”을 기록하는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 2019년부터 꾸준히 나오는 한 가지의 사건과 후회가 오늘 에피소드와 관련이 있다.
ROTC 후보생은 총 세 번의 입영 훈련을 거치고 임관한다.(59기 기준) 3학년 겨울방학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과 3, 4학년 여름방학 중 한 번 4주간의 하계전투지휘자훈련, 마지막으로 졸업 전 겨울방학 때 4주간의 야전지휘자훈련을 끝으로 대학 졸업과 임관을 하게 된다. 오늘 에피소드와 관련된 훈련은 3학년 여름방학 간 있었던 하계전투지휘자 훈련 때의 일이다.
2교육대대 4중대 1소대 1분대
당시 하계전투지휘자 훈련의 특징은, 처음으로 전국권역의 후보생들이 섞여서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학교도 다르고 지역도 다른 약 4000명 가량의 후보생들 중 랜덤으로 대대와 중대와 소대, 분대를 이루어 함께 생활을 하고 평가를 받는 훈련이다. 당시에 우리 분대는, 숭실대 학군단 출신인 나를 비롯해서, 인하대, 경기대, 영남대, 전북대, 동아대, 금오공대, 강원대, 세명대, 목원대, 단국대 학군단에서 온 동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약 한 달간 진행되는 입영생활 간, 좋은 동기들을 만난 덕분에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을 받고 생활을 했었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어우러져 생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대학생활을 하다가 한 달 간 입영한 대부분의 후보생들은 얼른 훈련을 마치고 퇴소하는 날만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유난히 뜨겁던 당시 여름, 우리는 한 달간 여차저차 많은 훈련들을 완수해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퇴소일을 앞둔 3일간의 마지막 훈련이 진행되었다. 당시 훈련은 ‘분대공격’이라는 훈련으로, 분대 단위로 각 상황에 따른 공격 훈련이 진행되었다. 한 달 간의 빡센(?) 훈련과 평가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이것만 마치면 집에 간다.’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던 때였다.
3일의 훈련 중 2일의 훈련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치고, 마지막 날 훈련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날 훈련은 야간훈련까지 포함되어 늦은 밤까지 교장에서 훈련을 하고 복귀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날만 잘 마무리되면, 다음날 휴식을 취하고, 그 다음날에는 위문공연과 함께 축제를 즐기며, 그 다음날 퇴소만 하면 집으로 갈 수 있는 스케줄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야간훈련도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장비점검만 하고 생활관으로 복귀만하면 끝이었다. 앞에 선 대표 후보생을 통해 마지막 장비점검이 시작됐다.
“개인화기! 이상 무, 가스조절나사! 이상 무, 수통! 이상 무 … 대검!”
“이상 …”
“이상 무!”라고 외치면 이제 집 갈일만 남은 이 상황에서, 손으로 대검이 장착되어 있던 곳을 만져보니 만져지지 않았다. 없었다.
나는 당일, 마지막 훈련이라는 기쁨마음으로 훈련에 참여했다. ‘분대공격’ 훈련의 특징은 총기와 장구류를 모두 장착한 상태로 뛰거나 포복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에는 어떤 훈련을 해도 장비점검에서 이상이 없었는데, 왜 유독 그날 대검이 없어졌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상태로 담당 교관님께 보고를 드렸다. 우선은 야간 훈련으로 밤이 늦었으니 내일 찾으러 오자고 하셨다. 마음의 큰 무거운 짐을 지고 당일에는 생활관으로 복귀했다. 다음 날은 예정대로 모두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우리 생활관 친구들은 나로 인해 쉴 수 없었다. 아침부터 어제 대검을 잃어버렸던 교장으로 가서 대검을 찾기 위해 수색을 했다. 그 때의 미안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 때 찾았더라면 다행이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대검은 나오지 않았다.
오후에는 소대 단위를 투입했다. 만약 이때도 못 찾으면 우리 대대 후보생동기들은 나로 인해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예정된 축제도 즐기지 못한 채 대검 수색을 한다고 공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후에도 찾지 못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찾기를 바랐지만, 왜 그 큰 대검이 보이지 않았을지 의문일 정도로 찾을 수 없었다. 당시 교육대대장님부터, 담당 훈육관님, 전국 각지에서 모인 알 수 없는 동기들까지 나로 인해 땀을 흘리며 대검을 수색했다. 이제는 미안한 마음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석식 전, 결국 찾지 못한 대검 사태로 대대 전원이 한 장소에 소집되었다. 내용은, 내일 예정된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대 전원이 대검 수색을 출발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향한 따가운 눈초리와, 흔히 들을 수 있는 욕들, 타 대대 동기들을 통해 오는 연락들은 나의 숨을 점점 멎도록 만들었다. 나를 향한 비난과, 눈초리, 연락은 대부분 “폐급XX"였다.
나를 걱정하는 많은 동기들의 보호와, 위로 섞인 연락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의 잘못을 온전히 나의 책임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의 내 짧은 인생의 경험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있을 때 내가 함께 ‘연대책임’을 진적은 있었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함께 지게 한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 나의 책임으로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일들만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힘과 의지로는 때로 책임조차 질 수 없는 상황들이 이 세상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이러한 생각이, 그 짧은 순간 나를 암울함으로 몰고 갔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의 가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과 인정’이었다. 내 스스로의 만족 범위에 도달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을 더욱 신경 쓰고, 타인의 인정을 나의 자존감으로 삼았었다. 그러다보니, 대검을 잃어버려서 타인의 비난과 원성을 사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싶었고,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후회스럽지만 당시 그 책임을 내가 죽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 때는 나 스스로 ‘죽어도 싸다’라고 생각했다.
석식을 먹으러 가기 전, 아버지와 울면서 통화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훈육관님께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생활관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는 식사를 하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행정반으로 찾아가서 훈육관님께 울면서 호소했다. “대검을 잃어버린 후보생입니다. 감당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죽고 싶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다행(?)히도 위와 같은 호소 이후에 대검을 찾으러 대대 전원이 투입되는 일은 없었다.
이 하나의 에피소드는 나의 삶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한 때는 너무나도 큰 상처와 후회였던 사건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나의 모습이었음을 인정하며 보다 나은 나를 도모하도록 자극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종종 되새기며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나의 유언장에서 후회하는 사건은 ‘대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대검을 잃어버렸을 때, 운 것을 후회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누구나 잘못도 한다.
그리고 인간은, 온전히 그 실수와 잘못을 되돌려놓을 힘이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위와 같은 깨달음을 견고히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후회하는 것은, 대검을 잃어버린 실수 혹은 잘못 그 자체가 아니다.
실수와 잘못을 받아드리고, 때론 도움을 받아야할 때도 있음을 알았어야 한다. 울며불며 누군가를 찾아가 호소할 일도 아니었고, 걱정하는 부모님께 우는 모습을 보여드려야하는 것도 아니었고, 너무나 어리석게 ‘죽음’이 ‘책임’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됐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구든지, 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은 때로는 도움을 받기도, 주기도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군대는 더더욱 그렇다. ‘전우’는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친구인데, 전쟁터에서는 전우에게 목숨을 빚지기도, 목숨으로 전우를 살리기도 한다.
실수와 잘못을 했을 때, 뻔뻔하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때론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리고 실수와 잘못의 책임을 회생할 수 없는 것으로 극단적인 생각을 하거나, 나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보이며 미래의 내가 후회하도록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실수 했을 때, 질타하거나 섣불리 위로하기보다 묵묵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장교가 되자.’
이 에피소드를 통해 훈련의 성과 그 이상의 것을 얻었다고 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면, 두 가지이다.
첫째,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믿어주고 함께해주었던 동기들을 만났다는 것.
둘째, 누군가의 실수에 섣불리 반응하기보다 묵묵히 도움을 줘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위 에피소드가 있었던 때로부터 약 3년 이상 지난 시점이다. 과연 나는 그 때의 그 다짐과 같이 군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남의 실수에 관대함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장교인가? 부끄럽지만 아니다.
나는 그 때의 다짐과는 달리 섣부르고, 급하고, 짜증이 많은 모습을 보이는 장교인 것 같다.
내게 후회스러운 사건을 되돌아보며 글을 쓰는 이 시점에 다시금 그때의 교훈과 다짐을 되새겨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군 생활을 되돌아보며 쓰는 ‘그 해의 유언장’에 또 다른 후회를 기록할 것 같다.
보다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남은 군 생활을 해내길 다시 한 번 다짐한다.
p.s. 이 자리를 빌어, 나와 함께 해주었던 소중한 동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동시에, 나로 인해 큰 곤욕을 당했던 약 4,000여명의 후보생 동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그 때의 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폐급 장교후보생 안이오’도 안이오다. 폐급 장교후보생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그 때의 다짐을 잊는 것이다. ‘폐급 장교’는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음 화 예고) : EP2. 나는 왜 보병이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