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었으면 우리 받아주지도 않아

우간다 캄팔라 클럽 점령기

by 만다지
KakaoTalk_20210906_213135464.jpg 2013년까지 캄팔라의 핫플레이스였던 클럽 이구아나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는 당시 우간다에 체류했던 나를 비롯한 20대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락이 닿는 친구, 안 닿는 친구 모두 이 글을 읽었을 때 불쾌감을 느끼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며 시작한다. 2009년 우간다 캄팔라에 단기 체류하던 한국인 20대는 대부분 국제워크캠프 봉사자거나 마케레레(Makerere) 대학교로 연수를 온 교환학생들이었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각기 다른 가정환경, 지역, 학교, 직장에서 성장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며 또 다른 의미의 사회화를 거친다고 했던가. 취재를 위해 학교 안팍으로 부지런히 뛰어 다녔다고 자부했던 나였지만 우간다에 와서 여러 다른 학교의 친구들을 만나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점을 깨달았다. 학외에서 만난 대학생이래봤자 대학 시간강사 연대모임, 반전모임, 맑스주의 모임 등 정치색 또는 사회적 노선이 분명한, 그 당시에도 비주류에 속하는 대학생들이었다.


우간다에서 만난 친구들은 정치적 노선에 따른 사회운동 참여니 하는 것들에 무관심했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자기만의 생각은 확실했던 친구들이었다. 술을 마시며 군대니 정치니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다가 화가나서 안경을 벗고 진지한 표정으로 "이보세요. ooo씨!"하며 생각이 다른 사람과 논쟁을 펼쳤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각자의 생각을 조직적 활동으로써만 접해왔던 나는 나서서 싸우고 연대하지는 않지만 조용히 자신만의 생각을 가꾸는 사람들을 처음 봤던 것이다.


우간다에 처음 도착한 날 그들은 진자(Jinja)로 래프팅을 떠났던 탓에 내가 그들을 실제로 만난 건 우간다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2009년은 유달리 한국인 봉사자들이 많은 해였고 워크캠프의 International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찾아온 우간다에서 난데없이 많은 동포들을 만나자 당황하는 봉사자들도 있었다. 오래 체류한 사람은 새로 온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고, 새로 온 사람들은 새로 온 사람들대로 오래 체류한 사람에게 기대는 분위기도 있었다. 또한 UPA 숙소에 한국인이 너무 많은 것에 불만을 가진 다른 외국인 봉사자들도 있었기에 새로 온 한국인 봉사자가 마냥 반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당시에는 인터넷을 하려면 캄팔라 시내까지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한국의 워크캠프 본부에 연락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일례로 당시 부간다(Buganda) 국왕 카바카(Kabaka)와 무세베니(Museveni) 대통령의 사이가 좋지 않아 지지자 간에는 충돌이 발생했고 이것은 소요사태로 발전해 나의 출국은 몇 주 미뤄져야 했는데, 이러한 현지 상황 또한 한국인 봉사자가 직접 워크캠프 서울 본부에 국제전화를 걸어 알려온 것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봉사자 y 또한 캄팔라에 나갔다가 성난 시위대를 만나 "무중구(Mzungu)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가 혼자 그곳을 걸어서 빠져나와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고 했다.


현지에서 에이전트 역할을 하는 UPA 또한 봉사자들이 일할 단체 주선, 유료 숙소 제공 이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고, 봉사자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숙소 코디네이터가 있긴 했지만 애먼 외국인 봉사자들 사이에서 남편감을 찾아 우간다를 떠나고픈 현지 여성일 뿐이었다. 위험한 상황을 가까스로 탈출해 숙소로 돌아온 y가 울면서 캄팔라의 상황을 전하자 코디네이터는 왜 거길 혼자서 갔냐며 "Stupid"하다고 말했고 화가 난 다른 한국인 봉사자 p와 w는 코디네이터를 찾아가 항의했다.


자비로 하는 봉사활동이지만 지내는 동안 캄팔라 시내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만나며 숙소 시세라던가 생활 환경 같은 것들을 비교하게 되면서 우리가 UPA에 내는 비용에 반해 숙소 환경은 턱없이 열악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내는 돈이면 캄팔라에서 수영장 딸린 집에서 살 수 있어"라는 게 당시 우리들의 푸념이었고, 명목 상 존재하는 현지 에이전트나 코디네이터들은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한국인들끼리 뭉치게 되는 게 어찌보면 당연스러웠다.


내가 치왕갈라에서 혼자 한달을 보내고 있을 때 캄팔라의 한국인 봉사자 w에게서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캄팔라에서 잠시 지내다 옮기기 전 한국인 봉사자 몇몇과 연락처를 주고 받았는데, 딱히 친하게 지내다 마사카로 온 게 아니라서 그 뒤로 연락을 할까 말까 주저하다가 받은 연락이었다. “캄팔라에 놀러오라"는 그 문자 한통에 금요일 아침 처음으로 혼자 새벽 버스를 타고 캄팔라로 향했다.


난사나(Nansana) UPA 숙소에 도착하자 모든 한국인 봉사자들이 나를 보고 경악했다. 나는 한국인들을 만나기 전까지 "피부가 탔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말에 숙소에 비치된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니 과연 갈색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반겨주었고 치왕갈라에서 칭총 소리, 야동 소리를 들으며 고독을 씹어온 나에게 그들의 존재는 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w가 요리한 맛있는 한식을 먹고 봉사자들과 함께 밤에 보다보다(Bodaboda)를 타고 캄팔라에 있는 클럽에 가서 술먹고 춤추고 노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한국이었으면 우리 받아주지도 않아"라는 w의 말처럼 우간다의 클럽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흙먼지 뒤집어 쓴 얼굴을 해도 받아주는 관대한 곳이었다. 그들의 내가 치왕갈라에서 한달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기에 바빴다. 나의 언어로 공감받고 나의 코드로 함께 웃을 때의 그 기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후로 나도 히로키처럼 금요일만 되면 짐을 싸서 캄팔라로 향했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오는 것도 아쉬워서 월요일 오후에 돌아오는 칭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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