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칭총은 누구냐?

영어 못하는 설움, Home의 의미

by 만다지
544433_278460215570163_148039647_n.jpg 봉사활동 끝나고 한참 뒤인 2012년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봉사활동 시절 사진이 많이 사라져서 아쉽다.

내가 봉사자로서 처음 맡은 업무는 1학년 시험지 제작이었다. 시험 문제를 타이핑하거나 시험지를 복사집에 맡기는 일이 아니라, 선생님이 전달해준 수기 작성 시험문제를 아이들 30명의 공책에 일일이 필사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수준에서 학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거였는데, 그 당시에는 내가 이러려고 우간다까지 왔나 속이 상하기도 했다. 한국어 수업도 했는데 한국어 교육 전공자도 아니라 그냥 인사말 정도 가르쳐주는 수준이었다.


활동한 지 나보다 오래된 히로키는 체육과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자이카에서 준 오토바이로 선생님들을 태워주며 자신의 쓸모를 발휘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 없이 붕 뜬 기분이었다. 나에게 이것은 뭐냐 저것은 뭐냐 영어로 묻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학교 선생님들의 간식이나 점심을 교실로 갖다 주는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점심을 요리하는 아주머니는 점심을 요리해주고 품삯을 받았는데 항상 말이 없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과 함께 앉아 장작을 지피기도 하고 야채를 썰거나 간을 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스스로 눈치보여 안절부절 못하는 시골사람 DNA를 지닌 나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때 내가 우간다에서 사용하던 폰은 모토로라 Bar형 폰이었는데 정말 전화, 문자만 되는 폰이었다. 인터넷은 마사카 시내에서도 이용하기 힘들었고 캄팔라의 인터넷 까페에서도 로딩에 시간이 오래 걸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한국에 국제전화라도 걸면 요금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에어타임(Airtime, 전화카드)을 사러 마을에 나가야만 했다. 정말 외로웠다. 난생 처음 한달 넘게 한국어를 못하니 정신적으로 고립감을 느끼던 힘든 시기였다. 나의 상태를 내 언어로 말하고 공감 받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영어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현지인들이 말하는 영어는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다. 도끼타? 도끼타가 뭐야? 라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 직접 써보라고 하면 Doctor를 적어주는 현지인들.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다양한 Variation을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도 친한 선생님, 안 친한 선생님이 나뉘어 갔다. 교감쯤 되는 여자 선생님은 출산 후 학교로 복귀하여 나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저 칭총은 누구냐”고 현지어로 다른 선생님들에게 물었다. 짧은 캄팔라 생활동안 칭총이 아시안을 칭하는 단어라는 것쯤 이미 알고 왔기 때문에 귓속의 필터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아시아인이고 봉사자 신분이라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를 희화화 하는 단어로 부른다는 게 화가 나긴 했지만 현지어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못 들은 척 넘겼다.


속상한 마음에 불을 지핀 사건이 있었으니, 카잉가의 비서 겸 학교 행정/총무를 담당하는 아기(Agnes)가 나에게 아이들의 시험문제 필기를 맡기며 시험문제지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루간다어로 베티와 함께 웃으며 마치 의도하지 않았는데 실수로 떨어뜨린 듯 해놓고 끝내 줍지 않고 나가버렸다. 아기는 나보다 몇 살 위였는데 사사건건 나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내 옷을 보고는 “너는 좋은 옷도 많은데 단정하게 입을 수 없어?”라고 말하기도 하고, 학교 창고 문을 열다 실수로 열쇠를 떨어뜨린 나에게 인상을 팍 쓰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내가 오기전 근무한 봉사자 헬렌은 “(코트폰에서 일하는 동안) 일본인 봉사자는 말이 너무 없어서 지루했고, 학교 선생님들은 몇 명은 좋았지만 나머지는 질투가 너무 심했어”라고 말했는데, 그녀가 말한 질투가 무엇인지 아기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험지를 일부러 떨어뜨리자 나는 폭발했다. 나는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 시자(Caesar)에게 “집에 갈거야”라고 말하고 숙소로 돌아와버렸다. 방안에 앉아 있으니 베티와 아기가 와서 사과했다. 시자는 도리어 화가 나서 나를 찾아와 “이런 일로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고 물었다. 내가 “I will go home”이라고 한 것을 시자는 내가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말한 줄 이해했던 것이다. 당시 나에게 집은 Home 이외에 다른 단어로 대체할 만한 게 없었다. 방 한칸 짜리 숙소를 House 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서 잠깐 머무는 숙소도 Home으로 생각했는데, 시자는 나에게 그럴 땐 Home이 아니라 Room으로 말해야 헷갈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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