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009년 10월에 드디어 내가 일하게 될 COTFONE(Community Transformation Foundation Network)이 위치한 마사카(Masaka) District로 이동하였다. 당시 UPA의 수장이던 쌤(Sam)아저씨가 나를 치왕갈라 마을로 데려다 주었는데, 미니버스를 타고 3시간, 택시를 타고 2시간 거기에 중간에 택시가 고장나는 바람에 길바닥에서 2시간을 버리니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에야 도착했다. 쌤 아저씨도 피곤했는지 옆자리에 앉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고, 나도 더운 날씨에 여러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 앉으려니 정말 피곤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내 캐리어는 살짝 열린 트렁크 사이에서 튕겨져 나올 듯 불안불안 했는데, 사람들이 밧줄로 묶어서 차와 단단히 밀착시켜주었다.
시뻘건 흙길은 곳곳이 움푹 패여 있었는데 자동차는 그 음푹 패인 부분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좌우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왜 이런 길을 흙으로 메꾸거나 하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기 때 빗물이 흐르는 물길이 건기때도 그대로 남았던 것이었다. 메꾸지 않는 이유는 어차피 또 우기가 되면 빗물이 흘러서 다시 움푹 패일 것이므로 반복되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르른 바나나 잎,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 카사바 밭들을 지나 이윽고 치왕갈라 마을에 도착했다. 잠시동안 구경한 캄팔라와는 달리 정말 시골마을처럼 보였다.
내가 일할 곳은 코트폰(COTFONE) 초등학교로, 치왕갈라 마을에서 오토바이로 3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니 코트폰 설립자이자 교장을 맡은 카잉가(Kyinga)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잉가는 말보다 액션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잘 웃으며 과장되거나 희화화된 몸짓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카잉가는 우간다 현지어인 루간다 억양이 섞인 영어를 구사했는데 정말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잉가는 내게 영어를 말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내가 영어사전을 가져왔다고 하니, "그러면 문제없어. 우리는 일본인 봉사자도 있는데 그 사람은 영어 한마디도 못하다가 지금은 잘하거든. 너도 금방 잘 할 수 있을거야"라고 말했다.
이곳에 같은 아시안이 있다니 정말 반가웠다. 마침 일본은 내가 중학교 때 처음 가 본 외국이기도 했고 일본영화에 관심이 많아 광화문 스폰지하우스며 핑크영화제며 쫓아다닌 덕분에 더욱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국가였다. 그 일본인의 이름은 히로키(Hiroki)였고 나는 그의 옆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마치 한국과 일본의 지리적인 위치처럼 그야말로 이웃사촌이 되는 거였다. 히로키 또한 나를 반기며 동네 이곳저곳을 소개시켜주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패션인 니뽄삘 그리고 카세 료, 오다기리 죠로 대표되는 일본 꽃미남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히로키는 나의 일본남자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렸다. 정말 첫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다.
히로키는 나를 키무(Kim)으로 부르며 자신의 방도 보여주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이 시멘트 바닥이 전부인 내 방과는 달리 침대, 커튼, 갖가지 살림도구들이 있었다. 게다가 샤워를 할 수 있는 별도의 칸막이와 배수구도 있어서 내 방과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히로키는 모든 걸 자기 돈주고 샀다고 했다. 자이카(JICA)에서 생활비 지원은 안해주냐고 물으니 나오긴 하는데 너무 적다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코이카(KOICA)는 갔다오면 정착금도 나온다"고 말하자 "코이카는 정말 좋구나"라고 대답했다.
내 방에 들어와 한국에서 가져온 모기장을 천장에 매달고 카잉가가 빌려준 매트리스를 놓았다. 히로키에게 고무대야와 물 20L가 담긴 제리캔을 빌려서 씻고 잤다. 샤워실은 숙소에서 2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곳에 있어서 제리캔을 들고 낑낑대야 했다. 샤워실은 화장실 바로 옆이었는데 세상에 지붕이 없었다. 뻥 뚫린 곳에서 옷을 벗고 몸을 씻으니 선녀가 된 기분으로 나를 훔쳐보는 나무꾼은 없는지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우기 때면 뻥 뚫린 지붕 사이로 폭우가 쏟아져서 따로 물을 준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봐 지붕은 일부러 안 만든다고 하였다. 내게 주어진 20L 물로 씻는 건 캄팔라 UPA 숙소에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생수통을 잘라 만든 바가지에 제리캔을 기울여 물을 받고 고무대야 안에 들어가 얼굴과 몸을 씻었다. 고무대야에 몸 씻은 물이 모이면 그 물을 머리에 적신 다음 머리를 감았다. 거품을 내는 단계에는 물을 조금씩 쓰다가 막판에 헹굴 때는 물을 시원스럽게 쓰고 나면 어느덧 제리캔의 물이 3cm 정도 남았다. 제리캔, 세면도구, 고무대야, 수건 등을 들고 숙소로 돌아오면 돌아오는 사이에 흙이 발에 묻는데, 이때 제리캔의 남은 물로 발을 씻으면 됐다.
다음 날 카잉가의 부인 베티(Beatrice)가 와서 내 방을 보더니 매트리스, 장판, 커튼, 고무대야, 제리캔, 가스곤로 등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사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 바로 전에 일했던 영국인 봉사자 헬렌(Hellen)이 살면서 구입한 물품들을 내가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베티는 헬렌이 쓰던 물건은 없으니 내 물건은 전부 새로 사야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카잉가와 베티는 봉사자들이 사용하던 물건을 모두 본인들이 챙기고 새 봉사자가 오면 새로 사도록 하고 있었다.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캄팔라 UPA 숙소의 봉사자들은 아무것도 살 필요 없이 숙소에서 제공되는 물품들을 사용하면 되는데 왜 나는 전부 새로 사야 하는 건지 화가났다. 심지어 UPA 숙소의 봉사자들과 똑같이 UPA에 400불을 내고 등록했는데 처우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카잉가는 여기서 생활하려면 전부 사야된다고 반복할 뿐이었고 나는 할 수 없이 베티와 함께 시장에 가서 여러가지 물건들을 샀다. 장판을 깔고 새 매트리스를 놓고, 커튼을 설치하니 그럭저럭 주거공간의 분위기가 났다.
치왕갈라는 저녁 8시면 사람들이 다들 잠을 잤다. 이따금 자정이 되면 밖에서 들리는 함성에 잠에서 깰 때가 있었는데 학교 선생님들에게 들으니 동네의 미친 사람들이 밤에 옷을 벗고 나체로 춤을 추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무속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나도 가서 보고 싶다고 말하자 학교 선생님은 박장대소를 하며 일반인들은 갈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해가 진 후면 고독감이 밀려왔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철판지붕을 긁는 소리가 나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말도 잘 걸고 친절하던 히로키는 어느 순간 부쩍 말수가 적어졌다. 캄팔라의 한국인 봉사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 지 궁금했다.